뿌리 내릴 자리를 만들다-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 복음자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14
영어공식명칭 Make a Place for Rooting - A Prototype of Village Community Movement, Bog-eumjali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훈도

[개설]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복음자리마을은 1977년부터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이 집단 이주해 형성되었다. 도시 빈민으로 살면서 가난에 찌들어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했던 복음자리마을 주민들은 제정구(諸廷坵)정일우(鄭日祐)[John Vincent Daly] 신부 등 헌신적으로 마을 공동체 운동을 펼친 관계자들과 함께 연대하여 자립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복음자리마을 공동체 운동은 우리나라 사회에 도시 빈민의 주거권을 환기시켰고, 마을을 넘어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지역 복지와 마을 만들기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신천동 83번지 집단 이주]

시흥시 신천동 복음자리마을은 1977년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과 양남동·문래동 등지의 판자촌 철거 이주민 170세대가 집단 이주하여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의 복음자리마을은 1979년 이주한 한독마을과 1985년 이주한 목화마을을 포함한 3개 마을을 통칭한다. 한독마을은 서울시 당산동·신림동·봉천동 등지의 철거민 164세대가 입주한 마을이고, 목화마을은 서울시 목동 철거민 105세대가 집단 이주한 마을이다. 세 곳 가운데 마을 공동체 정착을 이끈 동네는 가장 먼저 옮겨 와 형성된 초기 복음자리마을이다.

복음자리마을이 이주한 1970년대는 민주화 이전인 개발 독재의 시대다. 당시 정부와 행정 당국은 도시 빈민들을 위한 정책을 거의 세우지 않았다. 무허가 판자촌의 주민들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고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나마 살고 있는 판잣집이 철거되면 갈 곳이 없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빈곤의 악순환 속에 놓여 있었으나 대책은 전무하였다. 그럼에도 당국은 도시 정비를 내세워 철거를 밀어붙였다. 철거 이주민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고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음자리마을의 집단 이주에 앞장섰던 인물은 빈민 운동가 제정구와 미국 출신 예수회 신부 정일우다. 정 신부의 회고에 따르면, 1975년 철거되기 전 서울시 양평동 판자촌에서 두 사람은 철거민들과 그냥 같이 살면서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하면 그때 함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제정구정일우는 무허가 판자촌에 5평[약 16.5㎡]짜리 ‘예수회 복음자리’라는 동네 사랑방을 만들었다. ‘예수회 복음자리’는 양평동 판자촌 철거 계고장(戒告狀)이 날아들면서 집단 이주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7년 초부터 양평동 무허가 판자촌은 불안에 휩싸였다. 3월까지 이사하지 않으면 철거한다는 계고장이 붙었기 때문이다. 제정구정일우는 주민들과 상의하여 집단 이주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막막하였다. 집단 이주를 하고 싶어도 땅 사고 집 지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일우가 독일의 천주교 후원 재단인 미제레올(MISEREOR)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미제레올은 지원 결정을 내렸고, 미제레올이 빌려 준 5만 달러로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 33번지 포도밭이었던 땅 3만 2000평[10만 5785㎡]을 살 수 있었다.

[복음자리 공동체 형성 과정]

철거 이주민들은 어렵게 마련한 신천리 부지에 직접 벽돌을 찍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지어 나갔다.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집의 대문과 담을 쌓지 않았다. 복음자리마을은 1977년 말 완공되어 170세대가 입주하였다. 1979년엔 32세대가 2차로 추가 합류하였다. 그러나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도시 빈민으로 어렵게 살면서 몸에 밴 불신이 문제였다. 마을에서 매일 싸움판이 벌어졌다. 이주 전 살던 동네별로 패가 갈려 패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제정구정일우를 악덕 건축업자쯤으로 여겨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잦았다.

정일우는 주민들의 불신과 싸움을 한 그릇의 비빔밥으로 완성되는 과정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다시 말해 싸우고 화해하는 일들을 반복하면서 이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체로 조금씩 나아갔다는 의미다. 제정구정일우는 신천리로 집단 이주하기로 할 때부터 주민 모임과 마을잔치를 수시로 열었다. 복음자리마을 입주 후 해마다 단오와 연말에 성대한 잔치판을 벌였다. 숱한 회합과 교육, 잔치판의 공연과 술판은 주민들이 소통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였다.

제정구복음자리마을 입주 이듬해인 1978년 5월 복음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복음자리마을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복음신용협동조합은 처음부터 일반 신용협동조합과는 달리 조합원들의 경제적 유대 못지않게 사회적 인간관계 확대에 힘쓴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의 구호는 ‘일인은 만인을 위해, 만인은 일인을 위해’였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의 목표는 경제적 자립과 아울러 복음자리마을 주민들이 불신과 반목을 털고 마을을 신뢰의 공동체로 재탄생시키는 데 있었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은 자신의 사명과 목적에 충실하게 금융기관의 역할뿐 아니라 다양한 교양 강좌와 건강 강좌를 열었고, 수시로 주민 토론 모임, 생일 축하 모임, 경로잔치, 야유회로 친목을 다지는 데 힘썼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은 출자금을 낸 세대에 출자금 10배 한도 내에서 대출을 해 주었다. 집은 갖게 되었으나 변변한 직업과 소득이 없는 주민들에게 복음신용협동조합의 대출은 큰 도움을 주었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은 이주할 때 빌린 자금을 갚기 위한 저축 기관으로서도 중요하였다. 복음신용협동조합에 이어 1983년에는 복음장학회도 설립하였다. 자녀 교육 뒷바라지가 어려운 마을 주민들에게 복음장학회는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었다.

제정구는 또한 다양한 협동조합의 형태로 마을의 경제적 자립 방안을 거듭 모색하였다. 렉스토끼[Rex rabbit]협동조합, 한우협동조합, 건축자재임대협동조합이 차례로 결성되었다. 건축자재 임대는 5년간 지속되었으나 토끼와 한우 사육은 실패로 돌아갔다. 각종 협동조합 추진은 성패를 떠나 마을의 소통과 화합을 촉진하고 마을이 합심하여 살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복음자리 공동체의 정착]

복음자리마을이 들어선 지 8년 만인 1985년 복음자리마을한독마을 사이에 '작은자리'라는 공간이 문을 열었다. 3층 건물로 지어진 작은자리에서는 한글 교육, 서예 교실, 풍물 교육 등 복음자리마을 초기부터 이어져 온 각종 주민 교육 프로그램을 좀 더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고, 마을잔치는 물론 환갑잔치와 결혼식도 올리는 다목적 공간으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복음유치원과 복음신용협동조합의 사무실도 작은자리에 마련되었다.

작은자리의 개관은 복음자리마을 공동체가 정착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리는 공간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자리는 주민 간의 소통을 넘어 당시에는 개념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 복지의 중심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작은자리에서는 당시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은밀한 모임 장소가 필요했던 민주화 단체와 노조의 회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조합원을 모집하고 신용협동조합의 기능을 깨닫게 하는데도 애를 먹었던 복음신용협동조합은 1980년대 들어 마을 주민 90% 이상이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금융기관으로 기반을 다졌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의 후신인 경기시흥신용협동조합은 2004년경에는 회원 5,000명에 자산이 175억여 원인 금융기관으로 성장하였다. 복음장학회도 해마다 80여 명의 마을 주민 자녀에게 장학금을 주는 단체가 되었다. 복음장학회는 2002년 제정구장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은 덕분에 복음자리마을은 신천리 이주 과정에서 독일 미제레올에서 빌린 융자금을 모두 갚았다. 1979년 한독마을이 지어질 때 미제레올은 상환 받은 돈을 다시 대출해 주었다. 한독마을 융자금도 상환되어 1985년 목화마을 조성 때 다시 사용되었다. 한국의 판자촌 주민들이 자신들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한다는 입장이었던 미제레올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미제레올은 복음자리마을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복음자리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노력은 각종 잼과 차[茶]를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주)복음자리는 1989년경 세워져 유자, 포도, 딸기 잼 등을 생산하였다. (주)복음자리는 믿고 먹을 수 있는 식품회사로 입소문이 나면서 2000년대 초반 국내 잼 시장 점유율이 40%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였다. 공장도 경기도 안산시과 충청남도 논산시 두 곳을 운영하였다. (주)복음자리는 2009년 대상(주)[청정원]에 합병되었는데, 합병 당시 종업원이 50명에 연 매출이 200억 원가량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음자리마을의 공동체 운동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1986년 필리핀 막사이사이재단은 막사이사이상 지역사회 지도 부문 수상자로 제정구정일우를 선정해 시상하였다. 제정구정일우복음자리마을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철거민과 빈민촌의 일에 관계하면서 문제 해결에 골몰하였지만, 막사이사이상 수상자가 된 결정적인 공로는 복음자리마을을 철거 빈민들의 단순한 정착촌이 아니라 자립적이고 자조적인 공동체로 뿌리 내리게 한 점이었다. '아시아의 노벨상'으로까지 불린 막사이사이상은 복음자리마을 공동체 전체에게 수여된 영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자리와 지역사회]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에서 뿌리를 내린 복음자리마을 공동체는 1980년대 말경부터 마을 내의 일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 주민 운동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복음자리마을의 구심 공간이었던 작은자리는 지역 청년 모임을 활성화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주 초기 만들어졌던 복음청년회가 1987년에는 한독청년회, 지역 청년들, 지역 노동자와 결합하여 한울림청년회로 새롭게 발족하면서 지역 문화 사업, 지역 공중화장실 청소 등에 앞장섰다. 복음자리마을의 단오제도 소래읍[1980년 소래면이 소래읍으로 승격]의 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읍내 잔치가 되었다.

작은자리는 1992년 아예 시흥시 주민들이 작은자리 프로그램에 쉽게 참여하도록 운영 방식을 바꾸었다. 시흥시의 관계자를 초청해 강연을 하도록 하는 등 자치 행정과도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작은자리는 1996년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작은자리종합사회복지관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복음자리마을의 중심이 지역 복지의 거점 기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복지 기관이 국가 차원에서 설립된 데 비해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는 마을 주민들의 20년에 걸친 공동체 운동의 결실이었다.

복음자리마을 공동체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은 1991년 시흥시에서 진행된 한국화약주식회사[1993년 (주)한화로 상호 변경] 매립지 특혜 반대 범시민 운동을 비롯해 각종 주민 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제정구는 1992년 시흥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출범하기 시작한 시흥시의 여러 시민운동 단체의 관계자 가운데는 복음자리마을 공동체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 적지 않다.

[복음자리 공동체 운동의 의의]

서울의 철거민들이 1977년 복음자리마을로 집단 이주할 무렵은 도시 빈민, 주거권, 지역 복지의 개념조차 생소할 때였다. 복음자리마을 주민이나 이주 정착을 이끈 인물들도 체계적인 운동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마을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면서 길을 만들어 나갔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실천하였다.

복음자리마을 공동체 관계자들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벌어진 각지의 철거민 운동과 적극 연대하였다. 1985년 서울시 목동 철거 과정에서 도시 빈민을 위한 정책이 전무하다는 사실과 도시 빈민의 주거권과 생존권 문제가 절박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복음자리 공동체 운동은 도시 빈민의 문제가 당사자들의 주거와 빈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환경·빈곤 등이 중첩된 문제라는 인식을 우리나라 사회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복음자리마을 관계자와 주민들은 불신과 반목을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조금씩 ‘가난하게 살아도 정신이 훌륭한 마을'을 만들어 나갔다. 자립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끈질기게 계속해 이주할 때 빌린 융자금을 갚고 경제적 토대를 쌓았다. 마을 공동체가 정착 단계에 들어서면서 먼저 지역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시민들과 연대하였다.

복음자리 3개 마을 가운데 목화마을을 제외한 복음자리마을한독주택은 2000년대 말 시흥시 도시 재개발에 따라 아파트 단지로 변하면서 형태는 없어졌다. 하지만 무시를 당하고 배제되었던 철거민들이 자발적인 노력으로 마을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복음자리마을 공동체 운동은 2000년대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유행처럼 번진 마을 만들기 운동의 선구적 모범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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