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자리 빈민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736
한자 福音-貧民運動
영어공식명칭 Bogeumjali Poverty Mov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훈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7년 - 복음자리마을 조성
발단 시기/일시 1977년 4월 12일연표보기 - 남부순환도로 건설로 안양천 주변의 판자촌 철거민 170세대 집단 이주
전개 시기/일시 1979년연표보기 - 한독마을 조성
전개 시기/일시 1985년연표보기 - 목화마을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8년 5월연표보기 - 복음신용협동조합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3년 3월연표보기 - 복음장학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연표보기 -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설립 및 작은자리회관 개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작은자리회관에서 작은자리사회복지관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 복음장학회에서 제정구장학회로 개편
발생|시작 장소 복음자리마을 -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신천리 33번지 지도보기
성격 사회 운동
관련 인물/단체 복음자리마을|한독마을|목화마을|복음신용협동조합|복음장학회

[정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복음자리를 중심으로 진행된 철거 이주민의 지역 복지 주민 운동.

[개설]

복음자리 빈민 운동은 도시 철거민의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조차 없었던 1970~1980년대 경기도 시흥 지역에 집단 이주를 성사시킨 자생적 주민 운동이다. 제정구(諸廷坵)정일우(鄭日祐)[John Vincent Daly] 신부가 주민들과 함께 경제적 자립, 사회적 신뢰 형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사회 운동이자 우리나라 사회 운동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서울특별시는 1970년대 도시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도심 곳곳의 무허가 판자촌의 철거를 단행했다. 판자촌 주민들의 주거권이나 생존권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동 판자촌에 들어가 생활하던 제정구정일우 신부는 철거민들이 함께 이주할 방안을 찾아나셨고, 우여곡절 끝에 당시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신천리의 부지를 매입해 복음자리마을 건설에 착수하였다.

[경과]

복음자리는 좁은 의미로는 1977년 입주한 복음자리마을을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1979년 들어선 한독마을과 1985년 완공된 목화마을까지 통칭한다. 복음자리 빈민 운동 역시 세 마을의 이주 경위에서부터 정착과 변화를 위한 노력까지 전 과정을 포함한다.

복음자리마을은 1977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양남동, 문래동 등지의 철거 판자촌 주민 170세대가 공동 이주해 형성되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으로 독일 천주교 후원 재단 미제레올(Misereor)에서 5만 달러를 빌려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신천리 33번지 일대 3,200평[1만 579㎡]을 매입하였다. 1977년 6월부터 이주민들의 공동 노력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여 1977년 9월 24일 첫 입주를 시작하였으며 1977년 말에 입주를 완료하였다. 한독마을은 1979년 서울 당산동, 신림동, 시흥동, 봉천동 등 9개 지역 철거민 164세대를 모아 2층짜리 연립주택 6개 동을 지어 입주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85년에는 목화마을이 들어섰다. 목화마을은 서울 목동의 철거민이 이주한 곳이다. 목동은 원래 1960년대 말 서울 후암동 등지의 철거민에게 주어진 대토(代土) 부지였으나, 또다시 이곳에서도 철거를 당해 쫓겨나게 되었다. 목동 철거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고, 이를 통해 주거권과 도시 빈민 운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목동 철거민 105세대가 이주한 목화마을은 당시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은행리에 3층짜리 연립주택 3개 동으로 지어졌다.

복음자리라는 이름은 원래 1975년 서울 양평동 판자촌에서 명명되었다. 1975년 11월 양평동 판자촌으로 들어간 제정구정일우 신부가 5평짜리 판잣집을 마을 사랑방으로 사용했는데, 1976년 2월 11일 양평동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축성 미사를 올리고 ‘예수회 복음자리’라고 명명하였다. 이 명칭이 시흥군 소래읍 신천리 집단 이주 마을의 이름이 된 것이다.

소득과 생활이 불안정한 철거민 마을은 이주 과정에서부터 불신과 반목이 심각했다. 제정구정일우 신부는 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주민 모임과 마을 잔치를 수시로 열었다. 주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자생력을 높이기 위한 강좌도 계속 마련하였다. 1985년 복음자리의 공간적 거점이 되는 '작은자리회관'이 설립되었다. 복음자리마을한독마을 사이에 지어진 작은자리회관복음신용협동조합, 복음장학회 등의 업무 공간은 물론 강의실을 갖추고 유아원, 풍물반, 한글반, 서예반 등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또한 단오 축제와 연말 주민 잔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작은자리회관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민주화 운동 단체의 모임, 노조 결성 준비 모임의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제도화된 사회복지 기관이 없던 시절 지역 복지 거점의 역할을 해냈다. 작은자리회관은 1996년 2월 작은자리사회복지관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2001년 작은자리종합사회복지관으로 승격되었다.

제정구복음자리마을 주민들의 경제적 곤경을 타개할 목적으로 1978년 5월 복음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은 출자금을 낸 세대에 출자금 10배 한도 내에서 대출을 해 주어 주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은 또한 이주 당시 빌린 융자금을 갚기 위한 저축 기관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83년 3월에는 복음장학회도 설립되었다. 서강대학교 김어상 교수의 기부금으로 시작된 복음장학회는 2002년 제정구장학회로 개편될 때까지 복음자리마을 자녀들의 학자금을 지원하였다. 제정구정일우 신부는 복음자리마을 입주가 끝난 직후부터 경제적 자립 방법을 다각도로 강구하였다. 렉스(Rex)토끼협동조합, 한우협동조합, 건축자재임대협동조합 등을 차례로 시도하여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꾀했다. 렉스토끼협동조합과 한우협동조합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건축자재임대협동조합은 5년 동안 지속되며 사업성을 보였다. 이후에도 자립을 위한 모색은 계속되어 각종 차와 잼을 생산하는 주식회사 보금자리를 설립하였다.

[결과]

복음자리 빈민 운동은 철거민 집단 이주와 정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주민 운동이었다.

[의의와 평가]

목화마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복음자리 빈민 운동은 주거권의 개념과 도시 빈민 운동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무엇보다도 복음자리 빈민 운동은 지역 복지에 대한 관심과 제도화 수준이 낮았던 시기에 자발적·자생적 조직화를 통해 지역 복지 운동을 선도하였다. 또한 작은자리회관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을 지원하는 역할도 감당하였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각 부문 사회 운동과도 연대하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그동안 시흥 지역에서 벌어진 각종 주민 운동에도 복음자리 빈민 운동 관계자들은 깊은 관여를 해왔다. 예를 들면 1991년 한국화약주식회사[1993년 (주)한화로 상호 변경] 군자 매립지 특혜를 반대하는 범시민 운동 당시에도 제정구가 위원장을 맡아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였다. 복음자리 빈민 운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생겨난 시흥 지역의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모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정구정일우 신부는 1986년 막사이사이상(Magsaysay Award) 지역 사회 지도 부문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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