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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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방문식 |
[연꽃이 무성한 관곡지]
관곡지(官谷池)는 조선시대부터 시흥 지역에 세거한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조선 제7대 왕 세조 때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중국 명나라 난징[南京]에서 가져온 연꽃을 심어 현재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조선시대 시흥 지역이었던 안산군의 별호(別號)를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관곡지는 강희맹의 딸과 연이 닿은 권만형(權曼衡)이 물려받은 이래 대대로 안동 권씨 화천군파(花川君派)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 무렵에는 경기감영의 승인을 받아 안산군 차원에서 관리인을 뽑아 신역을 면제하는 등 체계적으로 연지(蓮池)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19세기 고종 대에 이르러 연지기에게 잡역을 부과하고 관리가 소홀해지는 폐단이 발생하자 안동 권씨 종중은 선산의 나무를 팔아 연못을 보수하였다. 종중의 재산이라기보다 마을 공동체의 자산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관곡지의 유래]
관곡지의 연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강희맹과 관련이 깊다. 강희맹은 조선 세종부터 성종까지 6대 왕을 모신 유력한 인사였다. 강희맹은 『금양잡록(衿陽雜錄)』과 『촌담해이(村談解頤)』등의 문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희맹이 관곡지와 관련된 행적을 남긴 때는 1463년(세조 9)이다. 1846년(헌종 12) 권용정(權用正)[1801~1861]이 지은 『연지사적(蓮池事蹟)』에 따르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강희맹은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 난징에서 새로운 품종의 연꽃인 ‘전당홍(錢塘紅)’을 가져와 연못에 심었다. 이 작은 연못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에 있는 관곡지이다.
1466년(세조 12)에 연꽃이 무성해져 ‘연성’, 즉 연꽃의 고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연지 고사(蓮池故事)라 한다. 강희맹과 연지 고사는 1797년(정조 21) 8월 정조의 제10차 원행 때 안산 지역 유생들에게 시제(詩題)로 내려진다. 그 내용은 “중국 난징에 갔던 사신이 항저우[杭州]의 전당홍이라는 연꽃 종자를 가져와 읍의 별호를 연성이라 하였다[奉使南京取錢塘紅種之號曰蓮城].”는 것이다. 정조가 조선시대 시흥 지역이었던 안산군의 별호가 연지 고사에서 비롯된 연성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해 준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관곡지’라는 한자명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초산면 하중리였다. 때문에 조선시대 시흥 지역은 안산군을 서술한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곡지를 언급한 가장 이른 기록은 조선 후기 1842년(헌종 8)에 편찬된 『안산군읍지』이다. 안산군 대월면 산대장(山垈場) 앞에는 제언(堤堰)인 오취(烏嘴)와 전당(錢塘)이라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오취는 수십 석락지(石落只)[논밭의 면적을 헤아리는 단위로 1석락지는 2~3천 평 정도]에 물을 댈 수 있는 제방이며 전당은 ‘전당연(錢塘蓮)’이 자라는 못이라는 뜻이다. 후자에서 안산군의 읍명 중 하나인 연성이 유래하였다.
[안동 권씨와 관곡지]
조선 전기부터 최근까지 연지의 소유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안성이 본관인 이숙번(李叔蕃)[1373~1440]이 연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숙번은 사위이자 강희맹의 양부인 강순덕(姜順德)[1398~1459]에게 딸의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연지를 비롯한 주변의 토지를 물려주었다. 이후 이숙번의 장녀는 강순덕 사이에 자식 없이 사망하였다. 강순덕은 대를 잇기 위해 조카 강희맹을 양자로 들이고 재산을 물려주었다. 강희맹 또한 권만형을 사위로 들이고 딸의 재산으로 연지와 주변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후 관곡지 일대는 안동 권씨 화천군파에 대대로 내려왔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연지와 관련된 고문서는 안동 권씨 일족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관곡지 관련 안동 권씨의 고문서는 『안산군수 서목(安山郡守書目)』[1845], 『연지사적』[1846], 「안산군 완문(安山郡完文)」[1883], 「연지준지기(蓮池浚池記)」[1900] 등이 있다. 고문헌은 대부분 연지의 유래 및 수축 사실 그리고 연지기의 역할과 면역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연지사적』은 경기감영의 재가를 받아 연지기의 잡역 면제 처분 받기를 종용하고 있다. 연지는 수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연꽃을 죽이고 피폐하게 된다. 이에 정기적인 관리를 위해 인근 하중리의 백성 중에 연지기를 뽑은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생업과 잡역에 시달리기에 연못 관리에 소홀하였다. 때문에 연지기 여섯 명에게는 신포(身布), 연역(烟役)을 면제시키고 환곡을 부담하는 환호(還戶)에서 벗어나도록 배려하였다. 덧붙여 『연지사적』은 연지의 유래 및 수축 사실을 기록한 「서문」과 연지기의 잡역 면제에 대한 「연지수치후보초(蓮池修治後報草)」로 나뉜다. 특히 보초에는 하중리에 거주하는 연지기 6명의 명단, 결원 여부, 연지 관리 시 준수 사항 등을 기록하였다.
나머지 『안산군수 서목』, 「안산군 완문」도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안산군수 서목』은 연지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서목은 상사에게 올리는 첩보에 첨부되는 문서이다. 안산군 하중리에 연지가 있는데 연못을 관리하는 연지기 6명의 군역과 연역 등 잡역을 부과하지 말자는 내용이다.「안산군 완문」은 연지기의 잡역 면제 요청 이후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쓰여졌다. 완문은 관부에서 집단이나 개인에게 발급하는 확인서이다. 시간이 흘러 면제되었던 잡역이 다시 부과되어 연지 관리가 소홀해졌다. 이에 연지기의 면역을 확인하고 관리에 전념하라고 관에서 발급한 문서이다.
[선산의 나무를 팔아 관리한 연못]
「연지준지기」는 안동 권씨 집안의 권태선(權泰善)이 후손에게 남긴 문서로 종중에서 연지를 관리하게 된 경위를 전하고 있다. 1900년(고종37) 관의 연지 관리가 그치자 점차 진흙이 쌓이고 못 안에 수초가 자라나 연꽃이 피폐하게 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안동 권씨 종중이 나서 직접 연지를 관리하고자 하였으나 본래 청빈하여 재산이 부족하였다. 때문에 문중에서 의결하여 당시 경상도 금산현 검곡(儉谷)[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신안리]에 있던 선산(先山)의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베어 마련한 돈으로 연지를 정비하였다.
안동 권씨 종중에서 선산의 나무를 베어서까지 연지를 관리하게 된 사유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즉, 소유권이 대대로 안동 권씨 집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산을 관리하는 것은 언뜻 당연해 보인다. 오히려 조선시대 관에서 연지기를 설정하여 면역을 준 것이 특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는 토지 소유권과 연지의 성격 문제로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관곡지의 소유권은 조선 전기에 강희맹의 딸이 부친의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남편 집안인 안동 권씨 가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토지 소유 관념에 비추어 볼 때 근대적 성격의 배타적 사적 토지 소유권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연지는 직접적인 소출(所出)의 대상은 아니었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집 앞의 조경 시설도 아니었다. 당시 연지는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일종의 공공재적 성격이 있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기록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의 원행에서 안산군을 일컬어 연성이라고 하였다. 연성은 연꽃의 고을이다. 말하자면 조선 후기 안산군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중앙과 마을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이런 인식은 관과 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었기에 『연지사적』을 비롯한 안산군 관련 서목과 완문에서도 연지기를 하중리에서 뽑고 관에서 면역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점차 연지기에게 면제되었던 잡역이 부과되기 시작하고, 1900년에는 관에서 연지 관리를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안동 권씨 종중은 마을의 역사적 연원을 대표하는 연지가 수초와 진흙으로 피폐해져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다. 때문에 부족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직접 관리하기로 결정하고, 그 경위를 「연지준지기」로 남겨 후세에 전한 것이다. 이후 약 80여 년간 안동 권씨 종중에서 관곡지를 관리해 오다가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시흥시도 관곡지의 역사성과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감안하여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말하자면 관곡지의 공공재적 성격을 인정하여 다시 관에서 법적으로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시흥 시민의 관곡지]
관곡지가 시흥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이래 「문화재 보호법」과 「시흥시 향토문화유산 보호조례」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자는 최초 제정이 2003년이지만 관리 방향을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없다. 시흥시에서는 관곡지 일대에 관리자를 지정하여 보존과 점검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유적 보호를 위하여 보존 경비가 과다하게 소요되는 경우 소유자나 관리자에게 소요 경비를 보조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과거 조선시대에 비해 지역의 상징물에 적극적인 보호·관리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시흥시에서는 문화유산의 보호 및 관리뿐만 아니라 관곡지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시흥 지역이었던 안산군의 별칭인 ‘연성’과 연꽃을 지역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성’은 연성초등학교·연성중학교 등의 교명, 연성동의 동명, 연성 문화제(蓮城文化祭)라는 지역 축제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곡지’는 도로명이자 향토유적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시흥시는 연꽃 도래지로서의 인식을 바탕으로 관곡지가 위치한 하중동에 시흥갯골생태공원, 물왕저수지[흥부저수지] 주변 논과 더불어 연꽃테마파크를 조성하였다. 덧붙여 재배 단지 주위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운영하고 있어 관곡지와 연꽃을 마을 주민, 더 나아가 시흥 시민과 국민들에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이후 안동 권씨 집안에서 선산의 나무를 팔아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공공의 자산이 오늘날 다시 확인받고 향유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