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음사』 제1회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512
한자 蓮城吟社 第壹回集
영어공식명칭 The First Collection of Yeonseongeumsa's Works
분야 역사/근현대,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문헌/전적,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927년 - 연성음사 전국 한시 현상 공모 실시
간행 시기/일시 1929년연표보기 - 『연성음사』 제1회집 간행
소장처 김준권 - 경기도 시흥시 화정동 지도보기
성격 근대 문집[문학서]
저자 김창수·권택·이관용 외
편자 연성음사
간행자 연성음사
권책 1권 1책[양장본으로 추정]
행자 20항 46자
규격 세로 25.5㎝, 가로 18.0㎝

[정의]

경기도 시흥시의 옛 지명인 시흥군에서 활동한 한시 동호회 연성음사가 발행한 전국 한시 현상 공모전 수록집.

[개설]

1927년 연성음사(蓮城吟社)에서 전국적으로 한시 작품을 현상 공모하여 1929년 전국 한시 현상 공모전 수록집으로 『연성음사(蓮城吟社)』 제1회집을 출간하였다.

[저자]

김창수(金昌洙), 권택(權澤), 이관용(李寬鎔) 등이다. 한시 현상 공모에 북만주의 동포로부터 함경도와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이 참가했지만, 이들에 대한 생년(生年)은 물론 기타 인적 사항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아 그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편찬/간행 경위]

1920년 음력 5월 16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하중리[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에 '연성음사'라는 한시 동호회가 창설되었으나 활동이 미진하다가 1925년에 재결성하면서 계첩(契帖)[계원의 명단과 조항에 관한 문서]인 「연사명첩(蓮社名帖)」을 작성하였다. 「연사명첩」을 작성한 이후로는 정해진 규칙대로 한시 창작 모임이 계속 운영되었으며, 1926년 정월 16일 김교성(金敎城)의 집에 모인 회원들이 김교성의 한시에 차운(次韻)하여 지은 48편의 작품을 『연성음사 시첩』으로 묶어 편찬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로 연이어 창작물을 편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전국적인 한시 현상 공모를 하여 참가비를 받고 편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우선 다양한 방법으로 모집을 해 보고, 1927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하였으나 참여율이 저조하여 1927년 12월 1일 1개월의 마감 연기 광고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감시와 검열로 인해 최종 마감일로부터 2년이 지난 1929년 2월 21일에 이르러서야 『연성음사(蓮城吟社)』 제1회집을 출간하였다.

[형태/서지]

『연성음사』 제1회집은 양장본[추정]으로 되어 있는 인쇄본이다. 총 1권(卷) 1책(冊)으로 전체 크기는 세로 25.5㎝, 가로 18.0㎝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현재 원본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복사본은 시흥시청 향토사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연성음사』 제1회집은 총 608수의 한시 작품집으로 한시 작품과 연성음사의 사고(社告), 판권지(版權紙)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전국적인 한시 현상 공모전으로 입상자의 작품 175수와 미입상자의 작품 433수가 수록되어 있다. 입상 작품 1등 1수, 2등 2수, 3등 3수, 4등 8수, 5등 40수, 6등 121수가 포함되어 있다. 1등으로 입선한 작품으로 김창수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한다. 2등은 충청남도 예산군 사람 권택(權澤)이 쓴 작품이 뽑혔고, 3등은 경기도 부천군에 사는 이관용(李寬鎔)이 차지했다.

[의의와 평가]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1920년부터 1929년까지 활동한 '연성음사'라는 한시 동호회의 사례를 통해 당시의 다양한 문화 활동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지역 동호회가 근대 대중매체인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여 전국적으로 문학 공모를 하고 일제의 감시와 검열을 거쳐 작품집을 편찬하기까지의 일련의 활동은 전 시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근대 문학기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주체적으로 한시 창작 활동을 계승하고 지역의 이러한 문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국에 홍보하여 참여를 유도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당시 검열로 인한 이유에서인지 시대적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이 미약하여 순수 문학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측면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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