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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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古介面 |
영어공식명칭 | Singogaemyeon |
이칭/별칭 | 신현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근대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신현동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던 조선시대 행정구역.
[개설]
신고개면은 신현면의 다른 이름으로 신고개면의 '고개(古介)'는 우리 말인 '고개'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이고, 신현면의 '현(峴)'은 '고개'의 뜻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신고개면과 신현면은 같은 지명을 의미한다.
[관련 기록]
신고개라는 지명은 현재의 동 이름인 ‘신현’의 관련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8세기 중엽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부터 19세기 초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 1834년(순조 34) 김정호(金正浩)[1804~1866 추정]가 제작한 『청구도(靑邱圖)』, 1842년(헌종 8)에서 1843년(헌종 9) 초에 편찬된 『경기지(京畿誌)』, 19세기 중엽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정후조(鄭厚祚)[1758~1793]가 수정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동국팔로분지도(東國八路分地圖)』 「경기도」 등에 신현면이 전반적으로 확인된다.
신고개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지도도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중엽 영조 연간에 편찬된 『해동지도(海東地圖)』를 시작으로 1871년(고종 8) 편찬된 『경기읍지(京畿邑誌』, 1872년(고종 9) 편찬된 「인천부지도(仁川府地圖)」와 『1872년 군현지도[지방 지도]』, 1899년(고종 36) 편찬된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등에는 ‘신고개면(新古介面)’이라는 지명이 언급되어 있다.
[내용]
신고개면 또는 신현면이라는 지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편찬된 읍지와 지도에 선택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상에서 위치를 확인해 볼 때 신고개면과 신현면은 같은 지역의 지명으로 추정된다. 인구수가 언급된 『여지도서』의 기록을 확인해 볼 때 18세기 중엽 신현면에는 총가구 수가 459호이며 남성 476명, 여성 57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인천 내 주변 마을과 비교했을 때 가장 높은 수치이다.
1789년(정조 13)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를 보면 신고개면 내에는 일리, 이리, 삼리, 사리, 포촌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후 1912년에는 대야동, 삼리, 사천리, 신촌리, 창동, 고기리, 이리, 죽원, 산정리, 방곡리, 국동, 포동 등이 속해 있었다. 이후 신고개면은 1914년 전반면, 황등천면 등과 함께 부천군 소래면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의 시흥시 신현동 지역의 자연 마을로는 방골, 뒷그늘, 마산, 양우재, 새우개, 걸뚝, 신촌 등이 있다. ‘새우개’라는 명칭은 ‘신고개’, ‘새고개’, ‘신현’과 서로 연관된 지명이다.
[변천]
신고개면은 1910년대 초까지 인천부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부천군 신설로 전반면, 황등천면과 함께 부천군 소래면에 속하게 되었다. 1973년 부천군 폐지와 함께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되면서 시흥군 소래면 관할이 되었고, 이후 1980년 시흥군 소래읍 관할이 되었다. 1989년 시흥군이 시로 승격이 되면서 시흥시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고개면은 조선시대 이후 인천부, 부천군, 시흥군 등에 속하다가 지금의 시흥시에 편입되기까지 행정구역 개편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