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방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028
한자 個人防築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서원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개인이 쌓은 방죽.

[개설]

시흥 지역의 개인 방죽으로는 신천동의 서명운(徐明䉙) 방죽, 포동의 고문진 방죽과 조성근 방죽, 호조벌의 김창한 방죽, 이용구(李榕求)가 쌓은 방산동의 새방죽, 유 아무개가 쌓은 방산동의 가골 방죽 등이 있다.

[건립 경위]

서해에 접해 있던 시흥 지역은 농경지가 적어 조선시대부터 간척 사업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시흥 지역에서 바닷물을 막아 조성한 가장 넓은 농경지가 호조벌인데, 호조벌은 1721년 진휼청(賑恤廳) 당상(堂上) 민진원(閔鎭遠)의 지휘 아래 석장포[호조방죽]를 축조하면서 만들어진 논이다. 이에 반해 시흥에는 조선 후기부터 개인이 방죽을 쌓아 농경지를 조성한 사례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조벌 안에도 개인 방죽을 쌓은 경우가 있었다. 이는 농경지가 넉넉하지 못한 해안 지역에서 생산량을 늘리고 짠물 유입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황]

서명운 방죽은 일제강점기 중엽 신천동 출신 서명운이 만든 방죽이다. 이 지역 사람들에 따르면, 서명운은 대지주로 수염이 길고 몸집이 컸으며 항상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용구가 막은 새방죽은 서명운 방죽과 인접해 있다. 조성근 방죽은 농림부 기사 출신인 조성근이 1969년 매립 허가를 받아 뻘이던 곳의 조수를 막아 만든 방죽이다. 또 가골방죽은 유 아무개가 조성해 해답(海畓)을 얻었는데, 1978년 청룡저수지 건설로 수답(水畓)이 되었다.

방죽을 만들어 생긴 논밭을 방죽 이름 그대로 부르는 경우도 흔했다. 시흥 지역에는 호조방죽과 개인 방죽 외에도 크고 작은 방죽이 많았다. 지금은 196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경지 정리 등 개발에 따라 사라졌거나 방죽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논밭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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