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이다, 시흥의 근현대 교육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13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훈도

[개설]

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의 방편으로 시작한 시흥의 근대식 교육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이라는 굴절을 겪으면서도 광복 이후 양적·질적으로 팽창해 왔다. 시흥시 교육의 발전은 시흥 사람들의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가능했지만, 시흥시의 근현대 교육은 교육 공급이 교육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시흥시 교육의 발전에 대한 자부심 못지않게 앞으로도 풀어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근대 교육이 도입되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신분 차이를 떠나 국민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를 갖는 시대가 열렸다. 우리나라 근대식 학교는 주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시흥 최초의 학교인 무지리여학교도 마찬가지였다. 1901년경 인천부 황등천면 칠리[지금의 시흥시 무지내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설립자이자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Benton Scranton)의 지원으로 무지리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 계몽 운동기에 시흥 지역에도 본격적으로 근대 교육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06년 정윤영(鄭允永)이 황등천면 중림리[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세운 학교를 비롯해 1908년 황등천면 두곡리[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전우태(全宇泰)가 창흥측량학교(昌興測量學校)를 설립했고, 인천부 신현면 국동[지금의 시흥시 포동]에 1908년 엄선영(嚴選永)이 흥인의숙(興仁義塾)을, 정형택(鄭炯澤)과 정우택(鄭禹澤) 형제가 진명의숙(進明義塾)을 세웠다. 이들 사립학교에서는 한문과 성리학 정도를 제외하면 주로 근대 신학문을 가르쳤다.

일제는 1906년 통감부(統監府) 설치 이후 근대 교육 체계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일제의 교육은 근대 교육을 지향했으나, 조선인에게 초보적인 문자 해독 능력과 실용 능력을 길러주는 식민지 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사립학교를 억압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을 내려 일본어 교육과 일본 문물 주입에 중점을 두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시흥 지역에는 중등교육 기관인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가 한 곳도 없었고, 초등교육 기관인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 3개교만 있었다. 1920년 설립된 6년제 소래공립보통학교[지금의 소래초등학교], 1923년 설립된 4년제 군자공립보통학교[지금의 군자초등학교]와 1년제 군자공립심상소학교였다. 군자공립보통학교 학부모들은 1924년부터 6년제로 학년을 연장해 달라는 운동을 벌였으나, 일제 당국은 들어주지 않았다. 군자공립보통학교는 1937년에야 6년제가 되었다.

조선 사회의 교육관은 이미 근대적으로 바뀌어 있었고, 사회적 진출의 길도 학교교육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체제가 되어 있었으나, 지역의 교육 수요에 비해 학교 수가 매우 적었다. 일제 말기 1~2년제인 소래간이학교, 금호간이학교 2개교가 더 들어섰을 뿐 교육 수요에 부응하는 학교 증설은 더 이상 없었다.

3.1운동 이후 시흥 지역에서도 문화 운동 차원에서 야학과 강습소를 마을마다 자체적으로 세워 근대 교육을 하려는 움직임이 퍼졌다. 군자면 죽율리[지금의 시흥시 죽율동]에 1926년경 설립된 죽율야학을 비롯하여 논곡강습소, 오현강습소, 상곡강습소, 흥업강습소 등이 설립되어 취학하지 못한 아동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 최긍렬, 중학교를 세우다]

광복 이후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교육 이념으로 하는 교육 체계가 갖추어지고 학교도 더 설립되었다. 1947년 군자면 정왕리에 군서초등학교[지금의 군서초등학교]와 군서국민학교 오이도분교[지금의 옥터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49년 군자면 장곡리에 군자초등학교 장곡분교[지금의 장곡초등학교], 소래면 포리에 소래국민학교 포리분교[지금의 포리초등학교], 소래면 계수리에 계수국민학교[지금의 계수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57년에는 수암면 광석리에 연성국민학교[지금의 연성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수암면 광석리·하중리·능곡리 일대에는 초등교육 기관이 없어 학생들이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는 실정이었다. 시흥은 광복 후에도 교육 수요와 면적에 비해 학교의 설립이 더뎌 주민들의 교육열을 채워주지 못하였다.

1950년대 시흥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중학교가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에 논곡강습소를 설립한 최긍렬(崔兢烈)이 1950년 군자면 논곡리에 군자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제로 정규 국민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를 공민학교(公民學校),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을 위한 학교가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이다. 군자고등공민학교는 군자면 장현리로 이전하였다가 군자면 거모리에 학교를 짓고 1954년 군자중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시흥 지역에 근대 교육이 도입된 이래 반세기가 넘어 중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소래면에도 1959년 중학교가 들어섰다. 소래중학교6.25전쟁 중이던 1952년 미산감리교회 최진규 목사가 교회 교인들과 마을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성산중학원으로 시작되었다. 성산중학원은 비인가 학교여서 상급 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성산중학원은 1959년 소사중학교 소래분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60년 소래중학교로 승격하였다. 1968년에는 소래면 과림리에서 의화중학교가 개교하여 1970년 성택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2007년에는 한국글로벌중학교로 다시 한 번 교명을 바꾸었다.

1962년에는 시흥의 숙원이던 고등학교가 세워졌는데, 바로 군자면 거모리에 설립된 군자고등학교이다. 군자고등학교는 1977년 군자종합고등학교, 1989년 군자실업고등학교, 1990년 군자공업고등학교, 2018년 군자디지털과학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8년 통계에 따르면, 시흥에는 국민학교 9개교[소래권 4개교, 수암권 1개교, 군자권 4개교], 중학교 2개교[소래권 1개교, 군자권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군자권]에 국민학생 6,638명, 중학생 854명, 고등학생 101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소래권에는 소래고등공민학교와 소성고등공민학교 등 비인가 중등교육 기관도 2개교가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수암권의 경우 1957년 개교한 연성국민학교 1개교뿐인 데다 중·고등학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수암 지역의 교육환경이 가장 열악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학생 수의 변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시흥 지역 교육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점은 초등교육 학생 수가 계속 감소하였다는 사실이다. 국민학교의 수는 1950년대 말과 같이 9개교를 유지하였으나, 학생 수는 1968년 6,638명에서 1979년 5,674명, 1984년 5,069명으로 계속 감소하였다. 학생 수 감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이농 인구가 증가한 데다 초등교육부터 인근 도시로 입학시키려는 학부모가 늘어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중학생은 1968년 854명에서 1974년 2,520명, 1979년 3,007명, 1984년 2,525명의 변화를 보인다. 시흥 지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관내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늘고, 1970년대 중반 소래권에 중학교가 1개교가 더 설립되어 학생 수가 급증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고등학교의 경우 1970년대까지는 군자종합고등학교 1개교뿐이었으나, 1981년 소래종합고등학교[지금의 소래고등학교]와 한인고등학교[지금의 경기자동차과학고등학교]가 개교하여 3개교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고등학생 수도 1968년 101명, 1974년 454명, 1979년 650명, 1984년에는 2,394명으로 급증하였다.

한편 수암면 능곡리에서 1966년부터 중학교 과정 비인가 학교로 개교한 능곡재건학교는 1977년 능곡청소년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1979년 고등학교 실업 과정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83년 재정난으로 폐교하였다. 능곡재건학교는 모두 1,28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시 승격 이후: 교육 시설이 증가하다]

1989년 시 승격 당시 시흥 지역의 인구당 학교 수는 수도권 도시 가운데서 세 번째일 정도로 학교 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면적당 학생 수는 하남시에 이어 하위 두 번째였다. 한 곳의 학교가 넓은 면적의 인구를 감당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통학 거리가 멀어 어려움이 많았다.

동별로 학교 수의 편차도 컸다. 신천동은 인구가 많은데도 학교는 2개교뿐이었고, 목감동·과림동·신현동은 면적이 넓은데도 학교가 아예 없거나 1개교에 그쳐 학생들이 원거리 통학을 해야 했다. 농어촌 지역인 포리초등학교, 장곡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줄어 폐교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 중반부터 교육 여건이 크게 달라졌다. 택지 개발로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면서 학교 설립이 크게 늘어났다.

시 승격 당시 10개교였던 초등학교는 2006년 34개교, 2018년 44개교로 증가하였다. 중학교도 1987년 3개교에서 2006년 17개교, 2018년 23개교가 되었다. 고등학교 역시 1989년 3개교에서 2006년 12개교, 2018년 16개교로 늘었다. 그러나 동별 학교의 편중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으며 대학 진학이 교육의 목표처럼 변한 현실로 인해 교육의 질에 대한 우려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소규모로 설립된 유치원은 1981년 소래국민학교 병설 유치원 설립을 시작으로 2018년 42개 공립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사립 유치원도 2018년 30개로 시흥 관내 유치원은 모두 72개이다.

고등교육 기관은 1966년에 세워진 경기과학기술대학교, 1997년에 설립된 한국산업기술대학교, 2000년 설립된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산업기술·경영대학원, 2001년 설립된 한국산업대학교 지식기반기술·에너지대학원 등 모두 4개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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