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74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Korean Wa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훈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6.25전쟁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 - 6.25전쟁 휴전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성립까지 경기도 시흥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개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발발하였으나, 경기도 시흥 지역은 북한군의 주 공격 방향에서 비켜나 있어서 1950년 7월 초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시흥 지역은 주요 폭격과 함포 사격 대상이어서 집중 공격을 받았다. 1951년 1.4후퇴로 시흥 주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1951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걸쳐 수리산에서는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6.25전쟁은 시흥 지역을 폐허화하였으며, 분단 대결 의식을 내면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이래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였다. 1947년부터 격화된 미·소 냉전의 영향으로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1948년 5월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북한에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양측은 통일을 외치며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계속하였다. 당시 소련의 허락을 받은 북한은 1950년 6월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경과]

북한군의 서부 전선 주 공격은 서울~수원~오산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주 공격 선에서 비켜나 있는 경기도 시흥 지역에 인민군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50년 7월 3일이었다. 북한군은 해안 경비 목적으로 부천군 소래면 포리[지금의 시흥시 포동] 염부(鹽夫) 막사에 50명을 주둔시켰다.

시흥을 점령한 북한은 당과 행정 기구 재건 사업에 착수하였다. 시흥군에도 조선노동당과 사회 단체의 핵심 요원들이 파견되었다. 주로 과거 남로당원을 재심사해 당원으로 등록시켰다. 1950년 8월 시흥군당에서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로 보고된 서류에 따르면 시흥군의 군당위원장은 채석우였다. 1950년 7월 7일부터는 각 면 단위로 면당 조직이 시작되었다. 이어 민청[민주청년동맹], 여맹[여성동맹], 농맹[농민동맹] 등 사회 단체가 조직되었다.

점령 지역에는 임시 인민위원회가 예외 없이 들어섰다. 북한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선거를 통한 인민위원회 구성에 착수하였다. 시흥 지역에서도 7월 26일~7월 27일 이틀에 걸쳐 면과 리 인민위원회 선거가 치러졌다. 시흥군인민위원회는 토지 개혁에 착수하는 일과 경찰·군인·공무원·지주·반공 청년단원 색출과 주민 사상 교육 업무를 진행하였다.

시흥 지역에서도 5정보[약 4만 9587㎡] 이상 토지를 소유한 지주의 땅을 무상 몰수해 무상 분배하는 토지 개혁이 진행되었는데, 경기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지주가 적어 토지 몰수 실적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다만 소래면 포리의 염전과 어선은 국유 재산이라며 인민위원회가 압수하였다.

시흥군인민위원회는 8월 초부터 북한군 전력이 급격히 저하되자, 인적·물적 자원 동원을 위한 전선 지원 사업과 의용군 모집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시흥군 군자면에서는 1950년 8월 19일 청장년 500명이 참가한 청년 궐기대회가 열려 의용군을 강제 징집하였고, 수암면에서도 300명이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1950년 9월 4일부터 10일간 인천 반경 50㎞ 이내의 도로와 교량 등 교통 요충지는 모두 폭격 대상이 되었는데 시흥 지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시흥 지역 서해안에는 1950년 9월 13일부터 함포 사격도 집중되었다. 시흥 지역은 미군 군사 작전 지역인 청색 해안 지역이었다. 1950년 9월 15일 하루에만 청색 해안 지역에는 포탄 2,000발 이상이 퍼부어졌다. 대규모 폭격과 포격으로 시흥 지역의 상당수 집과 농토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대대적 공격으로 시흥 지역 주민들은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시흥군에 속하였던 수리산과 지금의 시흥시 정왕동화정동에 걸쳐 있는 마산[마하산(麻霞山)]은 중요 거점으로서 연대 규모의 공산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터키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치열한 수리산 전투를 벌여 1951년 1월 30일 마하산 고지를 점령하였고, 2월 4일에는 수리산 주변 주요 고지를 수복하였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시흥 지역은 전선의 후방이 되어 큰 전투가 없었다.

[결과]

1956년에 간행된 『경기도지』에 따르면, 1951년 9월 당시 시흥군의 피해 상황은 사망 1,888명 납치 90명 행방불명 165명 부상 1,022명 등 총 3,165명으로 집계되었다. 경기도 내에서는 5번째로 큰 인명 피해였다. 그러나 후일 정밀 조사에서 납치자 수가 647명으로 늘어나는 등 인명 피해는 이보다 더욱 큰 것으로 드러났다. 시흥 지역의 주택과 농지 역시 완전 폐허화될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남한 정부는 피난민 구호 대책으로 집단 수용촌을 여러 곳 세웠는데, 시흥 지역에도 신천동 붉은덕지, 포동의 국시랑과 걸뚝에 피난민촌이 들어섰다. 피난민촌은 원주민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의의와 평가]

시흥 지역도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의 전화(戰火)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인적·물적 피해도 컸지만, 북한의 점령과 수복을 두 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의 충돌과 이로 인한 주민들 간의 대결 의식·증오가 내면화되어 큰 후유증을 남겼다. 결국 개인적·집단적 고통이 지속되면서 분단 의식이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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