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모습으로 기를 내뿜는 군자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07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군자봉의 다양한 문화유산과 자연 마을 이야기.

[개설]

경상북도 경주시에 남산이 있다면 경기도 시흥시에는 군자봉이 있다. 군자봉은 행정구역상 시흥시 군자동장현동, 능곡동 사이에 자리한 높이 198.4m의 봉우리이다. 정확히 방어 시설인지 봉수대의 흔적인지 단언할 수 없으나, 군자봉에는 방어 시설로 보이는 흔적과 각종 토기류나 석축 잔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군자봉에는 고인돌·영응대군(永膺大君) 묘 및 신도비와 같은 역사 문화, 오창(梧窓) 박동량(朴東亮)[1569~1635] 가문 선산의 유교 문화, 성황사를 비롯해 이곳에서 전승되는 굿·굿당의 무속 문화가 있고,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세거해 온 자연 마을이 있어 군자봉만의 문화와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군자의 이름이 붙은 산]

사료(史料) 중에서 현재의 군자봉을 가리키는 ‘군자’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 안산군조(安山郡條)이다. 군자봉 혹은 군자산(君子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문종과 단종의 안산 방문과 관련하여 전해진다. 문종이 왕후의 묘에 행차할 때 산세가 절묘하고 웅대하다고 하여 군자산이라 명명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단종이 지금의 안산시 목내동에 있는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으로 가는 길에 이 산을 보고 마치 연꽃처럼 생겨 군자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군자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군자봉에 남겨진 역사]

군자봉 정상부 남쪽의 능선상에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조사되었으며 시흥시 군자동 구지정[구준물]마을 안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주민들은 마을에 있는 고인돌에서 고사를 지내고 고깃배의 닻줄을 매기기도 했다고 한다. 덮개돌에 고깃배의 닻줄을 매었다는 것은 20세기 초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오이도에는 신석기시대 조개무지가 발견되어 시흥 오이도 유적은 사적 제44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군자봉 주변에서 18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어 이 일대에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군자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초입에는 영응대군 묘와 함께 묘비와 상석, 향로석,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영응대군은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8남으로 문장에 뛰어났고 서화(書畵)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묘에서 동남쪽으로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1498년(연산군 4)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이 비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위에 이수(螭首)를 올렸다. 비면에는 ‘영응대군 신도비(永膺大君神道碑)’란 전제(篆題)와 ‘유명조선국 영응대군시경호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永膺大君諡敬孝公神道碑銘)’이란 비제(碑題)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글씨는 박경(朴耕)이 썼다고 한다.

산 동쪽 기슭에 있는 박동량의 종택과 선영은 유교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박동량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군자봉 기슭에 15만 평[약 0.5㎢]의 사패지(賜牌地)가 있었으나 현재 10만 평[0.33㎢]이 남았다. 군자봉 기슭의 선산에는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박미(朴瀰)[1592~1645] 신도비가 있다.

[천 년을 이어온 시흥 군자봉 성황제]

군자봉 산 위에는 성황사가 있었고, 면면히 이어져 온 시흥 군자봉 성황제는 201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군자봉 성황신으로 모셔지는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978]과 관련된 설화가 몇 편 전해지는데, 그중 한 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순왕이 고려에 사직(社稷)을 넘겨주고 경주를 떠나 충청북도 제원군[지금의 제천시]을 거쳐 강원도 원성군[지금의 원주시] 고자암(高自庵)에 미륵불상을 조성한 후 경기도 안산군 구준물마을[지금의 시흥시 군자동]에 이르러 안씨 부인과 생활하였고, 경순왕이 죽은 후 안씨 부인이 마을 뒷산인 군자봉에 매일 올라가 치성을 드리자, 어느 날 꿈에 경순왕이 나타나 안씨 부인을 위로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얼마 후 내의시랑(內議侍郞) 서희(徐熙)[942~998]가 송나라 사신으로 출행하게 되었는데, 안씨 부인의 영혼이 나타나 사행(使行) 길을 도와주어 그 은공으로 군자봉 정상에 경순왕의 영정과 안씨 부인의 소원당(所願堂)을 지어주었다. 그 후부터 인근의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2월에는 서낭대에 경순왕과 안씨 부인과 장모 홍씨의 영정을 모시고 인근 마을로 내려가 유가(遊街)를 돌고, 10월에는 군자봉 정상에 있는 소원당에서 신곡맞이[햇곡맞이]로 천여 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성황제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안산군 사묘조(祠廟條)에 두 곳의 성황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군자봉 성황사와 잿머리 성황사를 말한다. 군자봉 성황사는 조선 전기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여러 번 중건을 했으나 원인 모를 불이 나거나 밤중에 몰래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있으나,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정상 느티나무 앞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오늘날 군자봉에서 행하는 성황제의 굿은 10월에 산정에서 산제를 지낸 후 구지정[구준물]마을에 있는 김순덕(金順德)[1937~2009] 당주의 신당으로 내려와서 본격적인 굿이 시작된다. 당주는 할머니 때부터 어머니를 거쳐 김순덕으로 내려왔으며 2018년 현재 손녀인 고현희[1971년생]가 당주를 맡고 있다. 군자봉의 산신인 김부 대왕(金傅大王)의 신통함일까, 이곳 산정에서 말을 함부로 하면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도 전해진다.

오늘날 군자봉은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서 대표적인 민간 신앙의 기도처로 민간 신앙을 믿는 기도객들이 찾아가는 신산(神山)으로서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군자봉의 기(氣)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가 되는 듯하다.

[군자봉의 기를 받은 주변 마을]

군자봉 주변에는 산뒤, 구지정, 새터말이라는 자연 마을이 있다. 산뒤마을은 조선시대에 안산군 마유면 산북리였는데, 군자봉 뒤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구지정마을은 조선시대에 안산군 마유면 구정리[구지정리]였는데, 마을 내에 9개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9개 우물은 모두 우물물이 좋았다고 한다. 산뒤에는 문화 류씨(文化柳氏), 구지정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황씨(黃氏)·당씨(唐氏) 등이 세거하였고, 새터말에는 김해 김씨(金海金氏) 등이 세거하였다.

군자봉 주변의 마을에서 전해지는 “구지정 처녀는 기가 세서 시집가기 어렵다.”든지 “다른 믿음을 갖더라도 나이가 들어서는 반드시 군자봉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왕십리에 전해지는 “왕십리 처녀들은 타지로 시집을 가도 다시 돌아온다.”는 말과 비견(比肩)된다. 군자봉과 왕십리에는 유서 깊은 신당이 있다.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으로 고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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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5 내용 수정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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