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 성황사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79
한자 君子城隍祠址
영어공식명칭 The Site of Gunja Seonghwangsa
이칭/별칭 군자봉 성황사 터,읍치 성황사 터,안산군 성황사 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22-3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방문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2년 3월 15일연표보기 - 군자 성황사지 시흥시 향토유적 제14호 지정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22-3 지도보기
성격 민간신앙 터
관리자 시흥시
문화재 지정 번호 향토유적 제14호

[정의]

경기도 시흥시 군자봉에 남아 있는 성황 신앙의 터.

[개설]

성황(城隍)의 성(城)은 성벽을 뜻하고, 황(隍)은 방어를 위해 성벽을 둘러싼 도랑을 뜻한다. 즉, 성황은 성벽과 도랑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의미이며 성황 신앙이란 성곽 도시의 수호신에 대한 신앙 체계라 할 수 있다. 성황 신앙이 수용된 것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 무렵으로 생각된다. 이때는 전란의 시기였던 만큼 지역 수호신 신앙이 받아들여지기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 성황신을 지역 토성(土姓)의 시조로 보고 지역 수호를 뒷받침하기 위해 지방 호족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에는 성황신을 모신 데가 여러 곳 있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남단(南壇)이었다. 남단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으로 성황신,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신, 산천의 신을 함께 모신 제단이다. 이런 합단(合壇)의 방식은 명나라의 지방 제사 의례를 규정한 『홍무예제(洪武禮制)』에 따른 것이었다. 1439년(세종 21)에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되면서 조선의 제도로 정착되었다.

조선은 전국의 모든 부·주·군·현에 필수적인 종교 시설로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여단(厲壇)과 함께 성황사(城隍祠)를 두었다. 해당 지역의 수령은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를 읍치 성황사(邑治城隍祠)라 하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 각종 지리지에 기록된 성황사가 이것이다. 읍치 성황사를 지방 수령이 주재하고자 건의한 것은 민속신앙을 유교적 예제로 흡수하고자 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16세기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 유교적 원리주의하에서 성황 신앙은 음사(淫祀)로 간주되어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성황 신앙을 국가에서 주도했다는 사실은 잊혀진 채 민속신앙으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한편 국가가 공식적으로 성황을 제사하던 남단은 1908년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건’에 의해 폐지되었다. 오늘날 마을 동제당에서 성황신, 토지신, 여역신(厲疫神)을 함께 모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관방(關防) 신앙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변천]

군자봉 성황사는 구전되는 전설에 따르면 신라의 제56대이자 마지막 왕 경순왕[김부대왕]의 사후인 고려 초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달라 그대로 믿기 어렵고, 조선 영조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확실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안산군(安山郡) 산천조(山川條)에 따르면 성황사가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 군자산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른 시기인 1486년(성종 17) 관찬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지금의 시흥 지역인 안산군의 성황사는 두 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중 군치소(郡治所) 서쪽 21리[약 8.3㎞] 지점이라는 서술이 후대의 기록과 유사하다. 비록 1669년(현종 10)을 경계로 안산군의 치소가 달라졌지만, 읍치 성황사로 군자봉 성황사는 대동소이한 위치에 있었고 15세기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842년(헌종 8) 『경기지(京畿誌)』나 고종 연간의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에 수록된 안산군 지도에는 군자봉 성황사를 “군자봉성황단(君子峯城隍壇)”으로 표기하고 있다. 단(壇)이란 사(祠)나 당(堂)과는 달리 건물이 아니라 노천의 제단을 의미하며, 이 당시 건물은 없어지고 제단만 남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군자봉 성황사는 이후 다시 중건되었으나, 1964년 고의적인 방화와 파괴로 소실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록 군자봉 성황사는 예전의 모습을 잃었지만 시흥 군자봉 성황제는 시흥의 무녀들과 마을 주민들에 의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2002년 3월 15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22-3에 해당하는 군자봉 정상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0년 기전문화재연구원[지금의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는 시흥시의 문화유적을 개괄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일환으로 현장 조사를 실시하고 유적 일대에서 유물을 수습하여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현황]

군자봉 성황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당목 1기와 산림청 산불 감시초소가 있다. 주변에는 기와와 자기 등의 유물이 산포해 있다. 또한 군자산에는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정상부에 지름 20~30m가량의 토축(土築)이 남아 있다. 보고서는 성벽으로 규정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산성의 일부였다면 이곳이 성황사가 된 것도 전란에서 마을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성황 신앙의 연원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의의와 평가]

군자봉 성황사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있다. 먼저 읍치 성황사가 세워진 기록과 부합하여 시흥 지역 민간신앙의 일각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비록 터만 남아 당시의 자세한 모습은 살필 수 없지만 『여지도서』,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서 그 연원과 변천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흥 군자봉 성황제를 지켜내고 현재에도 이어가고 있어 시흥시 민간신앙의 양상을 자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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