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798
한자 蓮城齋
영어공식명칭 Yeonseongja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기도 시흥시 하상로 5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미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5년 5월연표보기 - 연성재 복원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0년 - 연성재 재실 증축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5년 11월 - 연성재 개축
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하상로 59[하상동 산2]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팔작집[재실]|맞배집[사당]
정면 칸수 7칸[재실]|3칸[사당]
측면 칸수 2칸[재실]|2칸[사당]
소유자 진주 강씨 문량공파 종중
관리자 진주 강씨 문량공파 종중

[정의]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강희맹의 재실.

[개설]

연성재(蓮城齋)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무덤을 관리하고 묘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실(齋室)이다. ‘연성(蓮城)’이란 시흥의 별칭으로, 강희맹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연꽃 씨를 가지고 귀국하여 이를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官谷池)에 심어 널리 퍼지게 하였다는 고사와 관련하여 붙은 명칭이다.

강희맹은 본관이 진주(晉州)이며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이다. 부친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모친은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형은 시·그림·글씨에 뛰어나 안견(安堅), 최경(崔涇)과 함께 3절(三絶)이라 불린 강희안(姜希顔)이며, 세종이 이모부이다.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한 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고 이후 예조좌랑(禮曹佐郞)과 돈녕판관(敦寧判官)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고, 1468년(예종 원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公臣) 3등에 책훈되었으며,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문집으로는 『사숙재집(私淑齋集)』과 농서 『금양잡록(衿陽雜錄)』 등이 전한다.

[위치]

연성재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산2에 있다.

[변천]

오래전 강희맹의 묘 앞에 사당이 있어 종손이 제사를 받들어오다가 후에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선영(先塋)으로 사당을 옮겼다. 그 후 6.25전쟁으로 사당이 소실되자 1965년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복원하였고, 1970년에는 재실을 지었으며, 2005년 개축하였다.

[형태]

연성재의 재실은 팔작집으로 길이 15.2m, 폭 5m의 전면 7칸과 측면 2칸 규모이며 건물의 총면적은 83.57㎡이다. 사당은 길이 6.3m, 폭 3.8m의 전면 3칸과 측면 2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연성재'라는 현판이 달린 외삼문(外三門)을 지나면 재실이 나오고, 재실 뒤의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하면 사당이 있다. 사당 뒤쪽에는 경기도기념물 제87호 '강희맹 선생 묘 및 신도비'를 비롯해 양부 강순덕(姜順德), 형 강희안, 장남 강구손(姜龜孫) 등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현황]

연성재진주 강씨(晉州姜氏) 문량공파(文良公派)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묘역 앞에는 연꽃 연못이란 의미의 하지골[荷池谷]마을이 있었다가 현성1지구 택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폐동된 뒤 1999년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으며, 이 아파트 단지는 하지골의 뜻을 지닌 연꽃마을로 명명되었다.

[의의와 평가]

연성재는 재실뿐만 아니라 사당 그리고 강희맹 집안의 묘소까지 한데 모여 있는 조선시대 사적지이자 시흥 지역의 유교 유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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