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63
한자 君子面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Gunja-myeon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군자면 만세운동,구 장터 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 1760 일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군자면 3.1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6일 - 구 장터 만세운동 주모자 체포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연표보기 - 군자면 일대 만세운동 격문 배포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연표보기 - 군자면사무소 부근 만세운동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3월 1일 -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강은식|김천복|권희|장수산|이종진|이종영|이응수|이덕증

[정의]

경기도 시흥시 지역이 속해 있던 옛 시흥군 군자면에서 1919년 3월에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

[개설]

군자면 3.1운동은 일제에 맞서 지역민들이 향촌의 전통 리(里) 조직을 통해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반대하며 군자면사무소와 거모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펼친 항일 독립 만세운동으로, 시흥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광복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시흥군 군자면은 지금의 시흥시와 안산시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구획되었다. 군자면의 중심은 지금의 시흥시 거모동으로 군자동, 정왕동[정왕본동, 정왕1~4동], 죽율동, 장곡동, 장현동, 월곶동을 포함한다. 안산시는 선부동, 초지동, 원곡동, 신길동, 목내동, 성곡동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따른 일제의 무단통치의 하부 기관에는 군자면사무소[지금의 군자초등학교]와 거모경찰관주재소[금의 군자파출소]가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가운데, 토지 조사 사업 등 경제적 침탈을 당하면서 봉건주의의 잔재인 지주 소작제(地主小作制)가 식민지 지주제로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군자면민 다수인 농민은 60% 이상이 서울 등지에 거주하는 지주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으로 연간 수입이 300원 이하로 매우 빈곤해졌다. 더욱이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간척지 개간과 전통 염업인 전오염(煎熬鹽)이 일제에 의해 각종 부역과 조선 염에 대한 수세(收稅)를 부담하게 되어 주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이런 가운데 군자면은 구한말(舊韓末) 일제 침략의 위기 상황에서 서해와 맞닿아 인천과 서해안 등지를 거점으로 하는 항일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안산군의 대표적인 장시(場市)인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에서는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으로 인해 1896년 안산군민들이 봉기하여 정부의 친일적 행태를 성토하는 대규모의 민중 집회를 열었다. 또한 민족주의자들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과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안산군 와리 반촌 등에서 사립학교를 활발히 설립하였다. 전통 서당도 민족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경과]

3월 29일 시흥군 군자면 장곡리와 3월 31일 선부리에서 다수의 주민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3일 “거모경찰관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리·동에 배포되었고, 첩지(諜知)를 하루 전에 입수한 일본 경찰이 영등포서에서 순사 6명, 헌병 7명을 무장하여 파견하였다.

4월 4일 오전 11시경 거모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약 천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원곡리 강은식(姜殷植)은 군중 속에서 구 한국기[태극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선동하여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죽율리에서는 김천복(金千福)이 주민들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기 위해 면사무소로 가라. 만약 불응하는 때에는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리의 주민 30명을 구장(區長) 집에 모이게 하여 거모리로 출발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총소리를 듣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천복은 다른 주동자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군자면사무소 부근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을 선동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달려들자 일본 경찰이 총을 쏘아 해산하였다.

한편, 4월 6일 장현리 서당생도 권희(權憘)가 대표로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내일 7일 이 마을 구 시장[지금의 서안산나들목 부근]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려고 한다. 각 주민은 구한국(舊韓國) 국기 1기를 휴대하여 모이라.”는 ‘비밀통고(秘密通告)’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였다.

거사 장소인 구 시장은 구 장터로 석곡산대장이었다. 권희는 작성한 비밀통고문을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하도록 그림으로 표시하고, 장수산(張壽山)을 시켜 마을 구장의 조카 이종영(李鍾榮)의 집 앞에 놓아두어 주민들이 돌려보게 하였다. 이종진(李鐘振)과 이응수(李應洙)도 비밀통고문을 장곡리 구장 이덕증(李德增)에게 전달하였고, 이덕증은 사환을 시켜 월곶리 구장에게 보냈다. 이러한 만세운동 모의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권희, 장수산 등이 체포되면서 무산되었다.

[결과]

군자면 3.1운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과 매질을 당하였다. 4월 4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강은식김천복은 체포·기소되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 판사 아리사와 사쿠치[有澤作治]에 의해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년에 처해졌다. 이후 항소하였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구 장터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붙잡힌 권희장수산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 판사 가나카와 히로키치[金川廣吉]가 각각 징역 1년과 10월을 선고하였다. 이들은 이에 항소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의의와 평가]

군자면 3.1운동은 한말 의병 항쟁과 민중 봉기, 애국 계몽운동으로 이어진 시흥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해방운동이다. 시흥시에서는 1995년 8월 15일 독립운동 유적지비를 시흥시 거모동 군자초등학교 후문에 세웠고, 시흥시와 시흥문화원에서 매년 기념식과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군자동 3·1절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2015년 3월 1일 군자초등학교에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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