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571
한자 金千福
영어공식명칭 Kim Cheonbo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2월 1일연표보기 - 김천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연표보기 - 김천복 군자면 3.1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68년 8월 5일연표보기 - 김천복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8년연표보기 - 김천복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연표보기 - 김천복 3.1운동 주동자로 피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3월 1일 -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7월 20일연표보기 -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 건립
출생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죽율리 597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이 속해 있던 옛 시흥군 군자면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천복(金千福)[1897~1968]은 시흥군 군자면 죽율리 출신으로 1919년 4월 4일 군자면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로부터 피체(被逮)되어 옥고를 치렀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가계]

본관은 금녕(金寧).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24세손으로 입향조인 17세손 김개천(金介天)의 7대손이다. 시흥시 향토유적 제7호 생금집과 관계된 죽율동에 대대로 세거한 집안이다. 아버지는 김경옥(金慶玉)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야미로 김만봉, 김만동, 김만손, 김만분 등 3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다. 둘째 부인 오순덕(吳順德)과의 사이에서 김현진, 김화진, 김수진 등 1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천복은 시흥군 군자면 죽율리 대암 출생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자면에서는 4월 3일 “거모경찰관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에 배포되었으며, 이 첩지를 하루 전 입수한 일본 경찰이 영등포로부터 순사 6명, 헌병 7명을 무장시켜 파견하였다. 4월 4일 오전 11시경 주재소 부근에 약 천여 명이 모였다. 군자면 거모리의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 부근인 지금의 도일시장 인근에서 강은식(姜殷植) 등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천복은 4월 4일 죽율리에서 손병희(孫秉熙) 등의 조선 독립 선언 취지에 찬동하여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죽율리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면사무소로 가라. 만약 불응하는 때에는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주민 30명을 구장 집에 모이게 한 다음 함께 거모리로 출발하였다. 이때 시위 군중이 일본 경찰의 총소리를 듣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김천복은 다른 주동자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집결한 수백 명의 군중과 합세, 선동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달려들자 일본 경찰이 총을 쏘아 이를 해산하였다. 김천복강은식과 체포되어 함께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아리사와 사쿠치[有澤作治]에 의해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년에 처해졌다. 이후 항소하여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 판사 제4부 이토 준키치[伊東淳吉]가 기각하였다. 재차 상고하여 7월 31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이시카와 마사시[石川正]가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평생 은둔 생활을 하며 어린 자녀들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쳤다.

[상훈과 추모]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시흥시는 2015년 3월 1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군자동 3·1절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군자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우고, 매년 시흥문화원과 시흥 지역의 3.1운동을 기려 기념식과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2018년 7월 고인의 업적을 기려 고향 죽율동 생금어린이공원에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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