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169
한자 去毛洞
영어공식명칭 Geomo-dong
이칭/별칭 거모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현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2년 2월 5일연표보기 - 경기도 안산군 대월면 거모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14년 3월 13일 - 경기도 안산군 대월면 거모리에서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거모리로 편입
변천 시기/일시 1989년 1월 1일 -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거모리에서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으로 승격 및 개칭
성격 법정동
면적 5.59㎢
가구수 9,930가구
인구[남/여] 24,831명[남자 12,965명, 여자 11,866명]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법정동.

[개설]

거모동은 시흥시 중동부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군자동에서 관할한다.

[명칭 유래]

거모동은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 넓은 들이었는데, '들'이 '틀'로 변하였다가 '털'로 되어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지형이 거머리처럼 생겨 거머리 또는 거모리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종합적으로 ‘검은 갯마을’이란 의미로 보여진다.

[형성 및 변천]

거모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의 석곡리와 거모포리였다가, 1912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경기도고시 제7호로 안산군 내 동리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거모리가 되었다. 그 뒤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을 기해 안산군시흥군과 수원군으로 분리 통합될 때 시흥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3월 13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옛 안산군마유면대월면, 와리면을 합쳐 군자면을 설치함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1월 1일자로 시흥군이 폐지되고 소래읍, 수암면, 군자면을 합쳐 시흥시로 승격되자 시흥시 거모동이 되었다.

[자연환경]

거모동은 시흥시를 중심으로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으로 경기도 안산시와 접하며, 북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난다. 오래전에는 어업이 성하였던 곳이나, 점차 농경지로 변모하였다. 이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경관이 변화하였다. 거모동 산2-1번지 일대의 산 정상과 거모동 산62-2 일대 야산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유적이 남아 있다.

[현황]

거모동은 2017년 12월 현재 면적은 5.59㎢, 인구는 9,930세대에 총 2만 4831명[남자 1만 2965명, 여자 1만 1866명]이다. 행정동인 군자동이 관할하는 법정동이다. 문화재로는 경기도기념물 제163호인 청주 한씨 문익공파 묘역이 있고, 교육기관으로 군자초등학교, 도일초등학교, 군자중학교, 군자디지털과학고등학교 등이 있다.

[자연 마을]

거모동에는 거무개, 도일, 망고개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거무개마을배우물 서북쪽으로 정왕동, 월곶동, 도일을 잇는 삼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세종 때 학자인 정인지(鄭麟趾)의 셋째아들인 정숭조(鄭崇祖)의 후손이 처음으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장인 한준겸(韓浚謙)[1557~1627]을 비롯해 한준겸의 아들인 한회일(韓會一) 등 청주 한씨(淸州韓氏) 문익공파(文翼公派)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는데, 1997년 5월 16일 경기도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도일은 시흥시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도일시장을 비롯하여 군자초등학교, 군자농협 등이 자리 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교통의 요충지로 석곡역(石谷驛)이 있었다. 망고개는 군자초등학교와 옛 장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초등학교가 들어서자 민가가 늘기 시작하여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고개는 본래 낮은 고개였는데 광해군의 장인인 류자신(柳自新)의 여섯째아들 류희량(柳希亮)의 묘를 옮겨올 때 이곳에 흙을 긁어 모아야 좌청룡 우백호가 완연하다 하여 고개를 높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고개를 ‘막은고개’라 불렀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망고개’라 불리고 있다.

배우물은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에서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을 때 배가 이 마을에 닿자 선원들이 갈증이 나므로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배우물’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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