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D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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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경희 |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오랜 세월 동안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옛부터 육곡리는 지대가 높아 물이 부족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민들의 가장 큰 걱정은 비가 오지 않아 한 해 농사를 망치지지나 않을까 하는 것으로 논산 지역에 가뭄이 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마을이 육곡리라고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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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곡1구
봄비가 내리지 않았던 해에는 한여름 중복까지도 모내기를 못하고 밭에 벼를 심어 수확한 적도 있었고, 곳곳에 둠벙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어떻게든 농사를 지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하늘만 원망하기 일쑤였다. 1974년경 본격적으로 관개시설이 개발되고 정비된 이후에야 비로소 물 걱정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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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말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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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말리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물이 없어 고생하던 시절을 마을 어르신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물이 얼마나 없었던지 작은 둠벙 하나로 한해 농사를 할 지경이었는데 그걸로 어찌 농사를 지어. 그러니 잡초나 풀이 자라 그 풀이 썩으라고 물속에 뉘어 노면 반대편에서 또 자라고 다시 풀이 자라는 반대편으로 뉘어 노면 다시 그 반대편에서 풀이 자라지. 그때 한 고생은 말로 다 못해.”
당시는 물이 너무 귀한 나머지 서천내를 경계로 나뉘는 육곡리와 왕암리 사람들은 물을 끌어다 쓰는 일로 다투기도 하였다. 특히 농사철이면 양쪽 마을 사람들끼리의 신경전이 대단하였다. 서천내는 두 마을을 경계로 흐르는 냇물이지만 건천으로 지금도 비가 오지 않으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물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이 부족한 물이나마 두 마을의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것이었다. 지금도 왕암리 사람들은 이 하천을 ‘왕암천’이라 부르고 육곡 사람들을 ‘서천내’라고 부르며 하천 이름의 물길의 소속을 정해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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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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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내 전경
이렇게 물이 귀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마을에는 물길을 함부로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전설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서천내’에 전해지는 서부자에 관한 이야기로 오래 전 육곡리에는 천석꾼 부자가 한 집 있었다. 얼마나 집이 부자였는지 이 집을 찾는 사람들로 매일매일 집안이 북적거리고 소란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들락거리며 찾아오니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그 집 부인의 손은 항상 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몸은 고되기만 했다.
부인이 자신의 고된 삶을 한탄하며 살던 어느 날 부자의 집으로 한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였다. 집까지 찾아온 스님을 빈손으로 보낼 수 없었던 부인은 곡식 한 바가지를 시주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게 된다.
“스님, 내 인생은 어찌 이리 고달픈지… 내 젖은 손이 마를 날은 없을까요.”
한참 동안을 부인의 시름을 전해 듣던 스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부인 내 한 가지 말해주리다. 저 왕암천의 물길을 막으시오. 그러면 찾아오는 손님이 줄어들 것이외다.” 라고 말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당장에 달려가 왕암천에 보를 쌓아 물길을 막아버렸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뒤로 서부자의 가세가 기울어 결국 집안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 천의 이름을 서부자집의 성씨를 따라 서천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 부족에 대한 오랜 걱정은 1939년 착공된 탑정저수지가 1942년 완공되었지만 육곡리는 그 혜택을 보지 못했다. 그 후 1974년 가야곡면 일대의 산 중턱에 수로를 개설하고 탑정저수지에서 다단계 펌프 시설을 완공함으로써 천수답은 완전히 사라지고 고대하던 수리안전답이 되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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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정 저수지
[정보 제공자]
서종선(1924년생, 육곡1구 주민)
서승구(1928년생, 육곡2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