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552
한자 金致仁
영어공식명칭 Kim Chiin
이칭/별칭 공서(公恕),고정(古亭),헌숙(憲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창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16년연표보기 - 김치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48년연표보기 - 김치인 춘당대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57년연표보기 - 김치인 이조참판 특배
활동 시기/일시 1762년연표보기 - 김치인 공조판서·이조판서·호조판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66년연표보기 - 김치인 좌의정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86년연표보기 - 김치인 영의정 역임
몰년 시기/일시 1790년연표보기 - 김치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8년연표보기 - 김치인 시호 헌숙 추증
추모 시기/일시 1986년 3월 3일 - 김치인 선생 묘 시흥시 향토유적 제1호 지정
묘소|단소 김치인 묘소 -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360-6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풍
대표 관직 이조판서|좌의정|영의정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 묘와 묘갈이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증조할아버지는 동부승지 김징(金澄), 할아버지는 우의정 김구(金構), 아버지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 심징(沈澄)의 딸이다. 혼인은 세 번 했다. 첫 번째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좌의정 이관명(李觀命)의 딸이고, 두 번째는 달성 서씨(達城徐氏) 사어(司禦) 서명흥(徐命興)의 딸이며, 세 번째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사인(舍人) 이요심(李堯心)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치인(金致仁)[1716~1790]은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조상의 음덕으로 품계를 올리거나 벼슬살이를 하는 것]으로 관직에 진출한 후 내시부교관으로 재임 중이던 1748년(영조 24)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특배(特拜)되었다. 1749년(영조 25)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1750년(영조 26) 홍문관부수찬, 1751년(영조 27) 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고 1752년(영조 28)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다. 1755년(영조 31) 성균관대사성, 1756년(영조 32) 공조참판을 거쳐 1757년(영조 33) 이조참판에 특배되어 영조를 친견하고 아버지 김재로에게 전하는 어찰(御札)을 받는 등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해 개성부유수·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762년(영조 38) 공조판서·이조판서·호조판서를 거쳐 1764년(영조 40) 비국당상(備局堂上)으로 차출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로서 인사 행정을 총괄하고,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당시 우의정을 세 번이나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지만 그대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766년(영조 42) 좌의정을 거쳐 1767년(영조 43) 영의정에 이르러 여러 번 사직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대로 임명되었다. 그 뒤 판중추부사·영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1772년(영조 48)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으나, 반년 만에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해 『명의록(明義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영중추부사를 거쳐 1786년 (정조 10)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김치인은 70세가 넘는 원로대신으로서 조정에 40여 년 동안이나 있었고 재상으로 20년이 넘게 재임하였다. 정조는 그의 공덕을 기려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도록 하였다.

[학문과 저술]

성품이 치밀하나 결단력이 있고 나라의 전고(典故)에 밝았다. 『명의록(明義錄)』,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 『대전통편(大典通編)』 편찬에 참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360-6에 있으며, 김치인 선생 묘는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790년(정조 14) 묘갈이 세워졌다. 이조판서 조돈(趙暾)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전면 글씨는 형 김치일(金致一)의 아들인 김종순(金鍾純)이 썼다. 김치인의 신도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반출해 갔다고 전해진다. 1798년(정조 22) 헌숙(憲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는 1797년 8월 행차에서 16일 김치인 묘에 치제하고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홍문관으로 하여금 준비하게 명하여 이듬해 시호 헌숙이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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