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35
한자 現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Er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훈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 - 시흥군 안양읍에서 안양시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 시흥군 남면이 군포읍으로, 시흥군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1년 - 시흥군 광명출장소에서 광명시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3년 - 시흥군 소래읍 옥계리와 계수리 일부 지역이 부천시, 광명시로 편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 시흥군 반월출장소에서 안산시로, 시흥군 과천출장소에서 과천시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 시흥군 군포읍에서 군포시로, 시흥군 의왕읍에서 의왕시로 승격 및 시흥군 폐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4년 - 시흥시 군자동에서 군자동과 월곶동으로 분리

[정의]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시흥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 광복 이래 경기도 시흥 지역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영광을 함께하였다. 분단과 6.25전쟁, 산업화, 민주화의 성취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고통과 기쁨을 직접 겪었다. 1973년 부천군 소래면시흥군에 편입된 이후 시흥군의 거듭되는 분리를 통해 인접 도시들이 만들어졌으며, 1989년 시로 승격한 시흥 지역은 생활권 분리로 구심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시흥시는 첨단산업과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환경 친화 생명 도시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행정구역의 변화]

경기도 시흥은 1989년 시 승격 이전까지 행정구역의 변경이 심하였다. 1949년 시흥군 동면 구로리와 번대방리가 서울로 편입되었고, 1963년 시흥군 신동면 전 지역과 동면 시흥리도 서울로 편입되었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일대가 시흥군에서 편입되어 형성된 지역이다.

1973년 시흥군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하였고, 1979년에는 시흥군 남면이 군포읍으로, 서면이 소하읍으로 각각 승격하였다. 1981년에는 시흥군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하였다. 1983년 시흥군 소래읍 옥계리와 계수리 일부가 부천시와 광명시로 각각 편입되었고, 1986년 시흥군 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시흥군 과천출장소가 과천시로 각각 승격하였다.

1989년 시흥군 군포읍이 군포시로, 시흥군 의왕읍은 의왕시가 되는 한편 시흥군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가 되면서 시흥군은 폐지되었다. 1995년 시흥시 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화정동 일부가 주민 투표를 거쳐 안산시로 편입되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시흥시 정왕동이 5개 동[정왕1동, 정왕2동, 정왕3동, 정왕4동, 정왕본동]으로 나뉘어졌고, 2010년에는 시흥시 연성동시흥시 능곡동장곡동으로 나뉘어졌다. 2014년에는 시흥시 군자동군자동월곶동으로 나뉘어졌다.

[광복 정국과 6.25전쟁]

1945년 광복 이후 시흥군에는 인민임시자치회가 결성되었고, 곧 인민위원회가 공식 결성되면서 군 청사를 인수해 실제 군 업무를 담당하였다. 시흥군인민위원회는 일정 기간 미 군정으로부터 유일한 지방 행정 조직으로 인정받았으나, 1945년 10월 미 군정 제60 군정 중대가 수원에 배치되었고, 시흥군 지역은 안양 분견대(分遣隊)의 통제하에 편제되었다. 1947년 11월 시흥군 청사가 안양읍에 준공되어 본격적으로 행정 업무를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시흥 지역은 북한군의 주 공격 방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1950년 7월 초에 점령되었다. 북한은 시흥 지역에서도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토지 개혁을 시행하였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시흥 지역은 주요 폭격과 함포 사격 대상이 되어 집중 공격을 받았다. 1951년 1.4후퇴로 시흥 주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시흥 지역은 1951년 1월 말부터 2월 초에 걸친 치열한 수리산 전투 등을 통해 수복되었다. 6.25전쟁으로 시흥 지역은 폐허되었다.

[1960년~1980년대]

시흥군은 도시화된 동쪽 지역[안양시 등 경부 축에 가까운 지역]에 비해 서해안과 인접한 서쪽 지역이 도시화와 산업화 측면에서 발전이 뒤처졌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어 번창하였던 시흥 지역의 염전들은 광복 이후 전매청(專賣廳) 관할이었다가 1963년 소금 전매제가 폐지되어 국유화되면서 대한염업주식회사로 넘어갔다. 그러나 소금 풍흉이 거듭되고, 민간 업체가 늘어나면서 제염 산업은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농가의 지붕 개량, 소득 증대 사업, 농로와 마을길 정비 사업 등으로 확산되면서 시흥 지역에서도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중반 시흥군 농촌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농촌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지만, 시흥군 동서 지역 간의 도시화와 산업화 발전 속도는 더욱 불균형해졌다. 한편, 1977년에 시흥시 신천동 일대에는 서울의 철거민들이 집단 이주해 복음자리마을이 형성되었다.

1980년대 들어 시흥군은 지속적으로 분리되었다. 1981년 광명시가 분리되었고, 1986년 안산시와 과천시가 분리되었다. 1989년 군포시와 의왕시가 별도의 도시가 되었고, 소래읍과 남부의 군자면·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1990년~2000년대]

1995년 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화정동 일부가 주민 투표를 통해 안산시로 편입되었으나, 시흥시의 면모는 1996년 시흥공단 입주 시작을 전후하여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공단 배후 단지로 조성된 정왕동 등의 인구가 크게 늘었다. 시흥시 전체적으로도 주택 가격이 타지에 비해 낮고, 주거 환경이 좋아 서울과 인천, 경기도 내 인접 도시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졌다.

시 승격 초기에는 생활권이 달라 통합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연성동을 개발하여 시청을 이전하기로 하고, 드넓은 갯벌을 매립하거나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여 지역 통합의 구심점을 확보해 나갔다. 군자 매립지[(주)한화 화약 부문 매립지]는 1990년대 초 시흥 시민들의 자발적인 개발 이익 환수 운동을 통해 시흥시가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시흥시의 드넓은 서해안 갯벌은 2003년부터 시흥갯골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또한 오이도와 월곶 지구도 정비되었고, 전체 면적의 88%가 개발 제한 구역이었던 목감동 일대도 2005년 택지 개발 예정 지구로 지정되었다. 2007년부터는 시화지구 남쪽에 첨단 복합단지인 시화멀티테크노밸리 사업이 추진되었다.

[현황]

2017년 5월 현재 경기도 시흥시의 면적은 135.79㎢이며 18개 행정동에 30개 법정동이 있다. 시흥시의 인구는 2018년 1월 1일 현재 45만 1386명[16만 7802세대]으로, 1989년 시 승격 당시 9만 3284명에 비해 35만 8102명이 늘어 4.8배 증가하였다.

군자 매립지는 2012년 배곧 신도시로 명명되어 서해안 개발 축의 거점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시흥시는 6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광역 교통망의 교차점으로서, 이웃한 인천광역시의 송도 신도시와 경기도 화성시의 송산 그린시티 등과 인접해 연계 발전을 모색 중이다.

시흥시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복합 산업단지이자, 시 면적의 64%가 개발 제한 구역으로서 자연 녹지가 잘 보존된 녹색 도시를 지향한다. 주민 평균 연령이 33.1세인 젊은 도시로서, 기회와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 지역으로 꼽히기도 한다. 물왕저수지~연꽃테마파크~시흥갯골생태공원~월곶~군자지구~오이도~시화호로 연결되는 수변 공간은 친환경 도시 성장의 동력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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