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297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조선
집필자 장현희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기도 시흥시의 역사.

[개설]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는 조선시대 안산군(安山郡)인천부(仁川府)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군자·수암권은 안산군의 잉화면(仍火面), 초산면(草山面), 마유면(馬遊面), 대월면(大月面)에 해당한다. 소래권은 인천부신현면(新峴面), 전반면(田反面), 황등천면(黃等川面)에 해당한다. 시흥 지역은 조선시대에도 어업과 소금 생산지로 유명하였으며 개펄의 개간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근기(近畿) 지역으로 왕의 외척 가문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중앙 정계의 변화에 따라 가문의 성쇠가 좌우되었다. 또한 왕으로부터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아 가문의 세거지가 된 경우가 많았다.

[행정구역의 변천]

조선시대 안산군인천부에 속했던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소래산과 중림(重林)을 경계로 하며 서쪽으로는 서해에 인접해 있다. 조선 철종 연간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우리나라 전국 지도 『동여도(東輿圖)』에 나타나 있는 조선 후기 시흥현(始興縣)은 지금의 시흥시보다 동북 방향에 있으며 시흥시와 인접하고 있을 뿐 행정구역이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안산과 인천 지역의 자료를 통해 추적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시흥시 영역은 조선 후기 안산군 서북쪽과 인천부 동남쪽 지역이 결합되어 있는 곳에 있다. 즉, 군자·수암권은 안산군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안산군 중 잉화면, 초산면, 마유면, 대월면 일대를 가리킨다. 소래권은 인천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인천부신현면(신고개면), 전반면, 황등천면 일대를 가리킨다.

1789년(정조 13)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타난 안산군 잉화면의 북곡리(北谷里)와 대월면의 거모포리(去毛浦里), 석곡리(石谷里)가 지금의 시흥시 영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또한 마유면에서는 마현리(馬峴里), 장종리(長宗里), 응곡리(鷹谷里), 월곶리(月串里), 죽율리(竹栗里), 정왕리(正往里), 구지정리(九之井里), 산북리(山北里), 오이도리(烏耳島里)가 해당한다. 초산면에서는 두모곡리(豆毛谷里), 목감리(牧甘里), 논지곡리(論知谷里), 물항동리(勿項洞里), 상직곶리(上職串里), 광석리(廣石里), 중직곶리(中職串里), 하직곶리(下職串里), 하직곶중리(下職串中里), 하직곶하리(下職串下里)가 해당한다.

인천부에서 지금의 시흥시 영역에 해당하는 곳은 신현면의 일리(一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사리(四里), 포촌(浦村)이다. 전반면에서는 일리(一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사리(四里), 오리(五里), 육리(六里), 칠리(七里)이다. 황등천면에서는 일리(一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사리(四里), 오리(五里), 육리(六里)가 해당한다.

조선 초기에 인주(仁州)로 불리던 인천은 1413년(태종 13) 인천군으로 개칭되었다. 인천군은 1459년(세조 5) 세조의 비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88년(숙종 14) 양주를 무대로 반역을 주모한 역승(逆僧) 여환(呂還)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나, 1697년(숙종 23)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 행정구역이 8도에서 23부제로 바꾸면서 인천부가 되었고, 1896년(고종 33) 13도제로 바뀌면서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인천부의 부사(府使)는 종3품관이었다.

안산은 고려시대의 안산군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온양 고을에서 전패(殿牌)[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패]를 훔친 생이(生伊)란 자의 태생지가 안산이라는 이유로 1663년(현종 4)에 안산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나, 곧 군으로 환원되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화성(華城)의 속읍이 되었다. 안산군은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실시될 때 인천부에 속하였고, 1896년(고종 33)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바뀌면서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부·군 통폐합 때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이 되었다. 안산군의 군수(郡守)는 종4품관이었다.

한편 시흥이라는 지명은 고려 성종 대에 금주(衿州)의 이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 말까지 금주현(衿州縣)[혹은 黔州縣]으로 불리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 행정구획 개편 때 금천현(衿川縣)으로 고쳐졌고 경기도에 속하였다. 금천현은 1414년(태종 14) 과천현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으로 개칭되었다가, 2개월 후 양천현(陽川縣)과 병합되어 금양현(衿陽縣)으로 개칭되었다. 1416년(태종 16) 다시 금천현으로 복구되었다. 1755년(영조 31) 금천현을 수원에 속하게 하였다. 1795년(정조 19) 금천현감을 현령(縣令)으로 승격시키고 읍호를 시흥(始興)으로 바꿨는데, 이는 옛 읍호(邑號)를 따른 것이다. 이때부터 시흥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쓰이던 금천(衿川)이라는 이름을 대신하여 이 고장의 고유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시흥현은 1797년(정조 21) 수원부(水原府)에 예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 때 시흥군으로 승격되어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시흥군은 1896년(고종 33) 13도제가 실시될 때 안산군·과천군과 함께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부·군 통폐합 때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이 되었다. 이때 지금의 시흥시 지역에 해당하는 군자면, 수암면시흥군에 속하게 되었다.

[군사 제도]

조선 초의 지방군 조직은 북방 양계(兩界)의 주요 군사 거점을 중심으로 하여 소지역 단위로 편성된 군익도(軍翼道) 체제였다. 지금의 시흥 지역이었던 인천은 부평도(富平道) 중익(中翼), 안산은 부평도 좌익(左翼)에 속하였다. 1457년(세조 3) 군익도 체제 대신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었다. 즉, 중·좌·우익의 편성을 갖던 종래의 체제를 주요한 지역을 거진(巨鎭)으로 하여 주변 지역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경기도의 경우 종래 3개 도(道)와 3개 독진(獨鎭)으로 편성되던 것을 수원·광주·양주·강화·개성 등 5개의 진(鎭)으로 나누고, 그 주위의 고을들을 편입시켰다. 인천안산은 수원진(水原鎭)에 속하였다.

1454년(단종 2)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인천군에는 군정(軍丁)으로 시위군(侍衛軍) 1명과 선군(船軍) 172명이 있었다. 1470년(성종 1) 병조의 보고에 따르면, 인천 제색(諸色) 군사의 군액(軍額)이 89명으로 나타난다. 이후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만든 전국 읍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당시 인천의 군정(軍丁) 총수가 1,555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영과 관청 등에 소속된 인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訓練都監) 휘하에 포보(砲保) 42명, 군향보(軍餉保) 12명이 있었다. 어영청(御營廳) 휘하에 정군(正軍) 27명, 자보(資保) 29명, 관납보(官納保) 50명이 있었다. 금위영(禁衛營) 휘하에 정군 13명, 자보14명, 관납보 24명, 별파진보(別破陣保) 2명이 있었다. 수어청(守禦廳) 휘하에 군수보(軍需保) 79명, 경표하군(京標下軍) 2명이 있었다. 총융청(摠戎廳) 휘하에 장초군(壯抄軍) 125명, 둔장초(屯壯抄) 14명, 군수보 135명, 둔군수보(屯軍需保) 27명, 경표하군 9명이 있었다. 병조(兵曹) 휘하에 속기병(屬騎兵) 65명, 청파(靑坡)·노원(蘆源) 역보(驛保) 44명이 있었다. 장악원(掌樂院) 휘하에 악생보(樂生保) 2명, 악공보(樂工保) 8명이 있었다. 자문감(紫門監) 휘하에 장보(匠保) 30명이 있었다. 강화부(江華府) 휘하에 속오초관(束伍哨官) 5명, 기고관(旗鼓官) 2명, 기패관(旗牌官) 10명, 겸역도훈도(兼役都訓導) 1명, 겸역파총표하군(兼役把摠標下軍) 29명, 속오원군(束伍元軍) 578명, 영기수호보병(營旗手戶保兵) 3명, 봉대별장(烽臺別將) 1명, 감관(監官) 5명, 겸역감고(兼役監考) 1명, 봉군(烽軍) 25명, 보(保) 75명, 수영수군(水營水軍) 67명이 있었다.

안산군의 경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의 안산군에는 군정으로 시위군 1명과 선군 115명이 있었다. 1470년(성종 원년) 병조의 보고에 따르면, 제색 군사의 군액이 55명으로 나타난다. 이후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안산군의 군정 총수가 1,22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영과 관청 등에 소속된 인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 휘하에 포보 30명, 군향보 46명이 있었다. 어영청 휘하에 상번군(上番軍) 40명, 자보 40명, 수미보(收米保) 22명, 별파진보 5명이 있었다. 금위영 휘하에 수미보 35명이 있었다. 수어청 휘하에 군수보 29명이 있었다. 총융청 휘하에 속오군(束伍軍) 571명, 장교(將校) 12명, 장초군 125명, 군수보 7명이 있었다. 병조 휘하에 기병보(騎兵保) 29명, 보병보(步兵保) 9명, 내취보(內吹保) 1명, 경역보(京驛保) 33명이 있었다. 장악원 휘하에 악공보 3명이 있었다. 의정부(議政府) 휘하에 차비서리보(差備書吏保) 23명이 있었다. 안산군(安山郡) 휘하에 봉수군(烽燧軍) 25명, 별장(別將)·감관(監官) 6명, 내원 토목장보(土木匠保) 5명, 영종수군(永宗水軍) 52명, 감영(監營) 기수보(旗手保) 45명, 조선지로군(漕船指路軍) 30명이 있었다.

[성씨와 인구]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시흥 지역의 성씨로 인천에 이(李), 공(貢), 하(河), 채(蔡), 전(全), 문(門)의 토착 성씨가 있었다. 또한 외부로부터 유입된 내성(來姓)으로 박(朴)이 있었으며 망성(亡姓)으로 최(崔)가 있었다. 안산 지역에는 김(金), 안(安), 방(方)의 토착 성씨와 망성으로 임(林)이 있었다. 이 같은 토성 구성은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시흥 지역 토성(土姓)의 경우 안산 김씨(安山金氏)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씨는 조선 초기의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이족(吏族)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시흥의 주요 세거 사족으로는 안산의 토착 성씨인 안산 김씨와 토성이 아니면서 시흥 지역으로 이거하여 정착한 진주 강씨(晉州姜氏)진양 하씨(晉陽河氏)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조선 창업에 협력하며 중앙 훈구파(勳舊派)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16세기 들어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면서 시흥 지역 사족에도 영향을 미쳤다. 훈구적 성향을 보이던 안산 김씨는 정치적으로 위축되어 갔으며 진주 강씨의 경우 시대 변화에 부응하며 사림의 성향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 외에도 16세기 시흥 지역에서 주목되는 가문은 이거(移居) 성씨인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이 가문도 사림의 성향으로 변화하였으며 17세기 사림의 붕당(朋黨) 분립 과정에서 서인(西人)의 당색으로 활동하였다.

17세기 들어 시흥은 사림 계열 인물들의 지역 기반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거해 온 사림계 가문들이 터전을 마련하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사림 정치의 전개와 함께 나타난 붕당의 분화로 시흥의 여러 가문들은 당색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이 가운데 문화 류씨(文化柳氏)는 대북(大北)의 중심 세력으로 선조 대에 번성하였다. 청주 한씨(淸州韓氏)도 북인(北人)으로 활동하였으나 인조의 비(妃)의 가문으로서 인조반정 후 서인 정국에서도 중앙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북인으로 정치 활동을 본격화하였으며 남인(南人)의 핵심 가문으로 활약하였다.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서인의 핵심 세력으로 공서파(功西派)로 활약하였다.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선조의 외척 가문으로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광해군 대에 한때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였지만, 인조반정으로 서인의 유력한 정치 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7세기 후반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화된 후 노론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8세기 학계의 큰 화두이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는 낙론(洛論)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조선 전기에는 왕실 등과 유력한 혼인을 맺으며 훈구파 계열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16세기에 들어 사림으로 변화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서인, 그리고 서인의 분화 이후에는 소론으로 활동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인천군에는 357호에 인구는 1,412명이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인천에는 총 2,934호에 인구는 9,632명이었다. 이 가운데 지금의 시흥시에 해당하는 신현면에는 459호에 인구는 1,053명(남자 476명, 여자 577명), 전반면에는 303호에 인구는 773명(남자 338명, 여자 435명), 황등천면에는 371호에 인구는 1,128명(남자 576명, 여자 552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산군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302호에 인구는 588명이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조선 후기 안산군에는 2,221호에 인구는 1만 90명이 살았다. 이 가운데 지금의 시흥시에 해당되는 안산군 마유면에는 488호에 인구는 2,170명(남자 1,090명, 여자 1,080명), 초산면에는 342호에 인구는 1,548명(남자 781명, 여자 767명), 잉화면에는 274호에 인구는 1,090명(남자 550명, 여자 540명), 대월면에는 239호에 인구는 1,052명(남자 531명, 여자 421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0년에 편찬된 『안산군읍지』에 따르면 조선 말기의 안산군 전체 호수가 2,792호이고, 인구수는 1만 1539명이었다. 이 가운데 지금의 시흥시와 관련된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초산면에는 483호에 인구는 2,108명(남자 1,162명, 여자 946명), 잉화면에는 396호에 인구는 1,594명(남자 877명, 여자 717명), 마유면에는 620호에 인구는 2,436명(남자 1,365명, 여자 1,071명), 대월면에는 223호에 인구는 945명(남자 524명, 여자 421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답 현황]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인천군에는 간전(墾田)이 2,601결이며 그 가운데 논이 3/7을 차지하고 있다. 토질은 기름진 것과 메마른 것이 반반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안산은 간전이 2,289결이며 그 가운데 논이 3/9을 차지하고 있다. 토질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었다. 두 지역 모두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중이 컸으며 어염(魚鹽)의 생산이 많아 어염을 주된 생계 수단으로 삼았다.

1594년(선조 27)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계속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지금의 시흥시를 포함하는 전국은 큰 피해를 당하였다. 특히 시흥 지역은 바다와 인접한 지역이어서 충청·전라·경상 등 삼남으로부터 조달되는 군량미의 주요 수송 통로이어서 피해가 더욱 컸다. 통계에 따르면 경기의 경우 농지가 15만여 결에서 3만 9000여 결로 대폭 줄어들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1646년(인조 24) 무렵에도 경기의 농지는 병자호란으로 1/4만 남았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실록』 1640년(인조 18)에 해당하는 기록에 따르면, 안산군은 병자호란 이후로 역(役)을 내는 전결이 겨우 330결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농지 상황이 매우 열악해졌다. 이에 국가에서는 농경지를 복구하고 생산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쏟는 한편 백성들을 향촌에 정착시키기 위해 면세 및 전세의 정액화, 공물의 전세화[대동법], 군역 변동, 의무 노역제의 폐지 등 부역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조세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한 농경지 복구를 위해서 종자나 농기구, 농우(農牛) 등을 대여해 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 『여지도서』에 따르면, 18세기 말 안산의 농·경작지는 한전(旱田)이 603결 55부 4속, 수전(水田)이 549결 4부 5속으로 총 1,152결 59부 9속이 되었다. 1759년(영조 35) 기준으로 자연재해로 황폐해진 면적과 궁방전(宮房田) 등의 잡탈(雜奪) 면세전을 제외한 안산 지역의 총 수세(收稅) 실결수(實結數)는 한전이 원장부(元帳簿) 전답의 78.2%인 472결 7부, 수전이 원장부 전답의 61.4%인 337결 31부 등 총 809결 38부로 호란 직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다. 당시 밭이 52.4%, 논이 47.6%를 차지하고 있어 논농사보다 밭농사 면적이 넓었다.

인천 지역의 경우 『여지도서』에 따르면, 원장부 전답으로 파악된 면적은 한전이 1,349결 19부 2속, 수전이 927결 8속으로 총 2,276결 20부가 되었다. 안산과 마찬가지로 한전의 비율이 높아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759년(영조 35) 기준으로 잡탈 면세전을 제외한 인천 지역의 총 수세 실결수는 한전이 736결 21부 5속이고, 수전이 627결 23부 6속으로 총 1,363결 45부 1속에 달한다. 한전의 경우는 잡탈 면세전 비율이 45.4%에 달하며 나머지 54.6%만이 총 수세 실결수로 파악되고 있다. 수전의 경우는 67.7%가 총 수세 실결수로 파악되고 있어 잡탈 면세전의 비율이 한전보다 낮은 편이었다.

안산과 인천의 면세전은 1794년(정조 18)에 편찬된 『부역실총(賦役實總)』에 따르면, 안산의 궁방전에는 수진궁(壽進宮), 용동궁(龍洞宮), 경수궁(慶壽宮), 화령옹주방(和寧翁主房), 화협옹주방(和恊翁主房)이 있었다. 인천의 궁방전에는 광해군방(光海君房), 내수사(內需司), 화협옹주방, 화령옹주방, 청근현주방(淸瑾縣主房), 경수궁이 있었다. 따라서 중앙 상납액 가운데 잡탈 면세전 비율이 포함되어 있어 총 수세 비율이 높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당시의 전답 상황을 알 수 있는 광무 양안(光武量案) 중 1900년에 작성된 『안산군양안(安山郡量案)』에 따르면, 안산군 6개 면의 원장부 전답은 총 1,337결 45부이며 총 수세 실결수는 1,336결 1부 8속이었다. 와리면 전(田) 74결 43부 5속에 답(畓) 188결 32부, 군내면 전 75결 84부 6속에 답 121결 54부 2속, 잉화면 전 50결 34부 8속에 답 103결 36부 6속, 대월면 전 49결 94부에 답 140결 6부 4속, 마유면 전 69결 52부 2속에 답 175결 40부 8속, 초산면 전 69결 97부 6속에 답 218결 47부 8속으로 전결(田結)은 총 390결 6부 7속이고[총 수세 실결수의 29.2%], 답결(畓結)은 총 947결 17부 8속이다[총 수세 실결수의 70.8%]. 이는 18세기 말 『여지도서』의 1,152결 59부 9속보다 184결 85부 1속이 증가한 것으로, 해안가를 개간하고 제언(堤堰) 수축(修築)을 통해 제언답을 확보함에 따라 경작 면적이 확대되었을 보여준다.

또한 18세기 말의 『여지도서』 총 수세 실결수에 비해 1900년 광무 양안 단계에 이르면 전[한전] 총 수세 실결수에 비해 답[수전] 총 수세 실결수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답 총 수세 실결수의 비율을 보면 대월면 73.7%, 마유면 71.6%, 초산면 75.7%로 나타난다. 안산군 전체를 보더라도 답 총 수세 실결수의 비율이 70.8%로서 전 총 수세 실결수의 29.2%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이는 밭을 논으로 바꾸어 벼농사에 집중한 결과이며 수리 시설을 확보함으로써 모내기법[이앙법]을 통해 수전의 생산력을 확보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농업과 상품 시장]

조선시대 안산 및 인천에 관한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주민 대다수가 농업과 어염을 주된 생활 방편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전기 농업과 관련한 모습은 강희맹(姜希孟)이 1475년(성종 6)~1483년(성종 14) 사이에 편찬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시흥 지역의 농업으로 수전 농업뿐만 아니라 소나무, 가래나무, 뽕나무, 자작나무 등이 언급되고 있는데, 조선 전기부터 양잠(養蠶)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었을 보여준다.

19세기에 편찬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따르면, 인천에서는 주안면에 서는 소암장[4일·9일]과 신현면에 서는 사천장[뱀내장, 1일·6일]이 있었는데, 신현면사천장이 지금의 시흥시 소래권에 서는 장시(場市)였다. 안산에서는 초산면에 서는 상직곶리장[2일·7일]과 대월면의 석곡산대장[3일·8일]이 있었다. 인천 지역의 상품 작물은 미곡(米穀),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철물(鐵物), 목물(木物), 인석(茵席)[돗자리], 연초(煙草), 우독(牛犢)[송아지] 등이 판매되었다. 안산 지역의 상품 작물은 미곡, 면포, 어염, 시자[사자(簁子), 체 또는 종다래끼]. 옹기(甕器), 인석 등이 취급되었다.

[어업과 어염]

조선시대 지금의 시흥시는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수산물이 토산품의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어업과 염업이 발달하였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와 각종 경기읍지, 지리지 등의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인천군은 어량(魚梁)이 19곳, 염소(鹽所)가 6곳이 있다고 하였다. 주로 참치가 나며 오징어, 농어, 갈치, 홍어, 넙치, 설치, 도미, 큰새우, 대합조개, 모시조개, 낙지, 소라가 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는 인천의 물산으로 소금, 농어, 홍어, 밴댕이, 송어, 조기, 황조기, 호독어(好獨魚), 민어, 상어, 붕어, 전어, 망어, 숭어, 참치, 병어, 오징어, 낙지, 조개, 황합(黃蛤), 죽합(竹蛤), 해양(海䑋), 토화(土花), 굴[石花], 소라, 게, 청게, 큰새우, 중새우, 쌀새우, 자하(紫蝦), 어표(魚鰾), 사자족애(獅子足艾)[사자 발바닥 모양처럼 생긴 쑥] 등을 소개하고 있어 해물이 풍부하고, 어업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인천은 경기도에서 남양 다음으로 소금 제조로 유명하였다. 인천에서 균역법(均役法) 시행 이후 바치는 균역세(均役稅)는 선세(船稅) 36량 2전, 염세(鹽稅) 196량 3전, 어세(漁稅) 109량 5전, 결전(結錢) 633량 8전 4분으로 합계 975량 8전 4분이었다.

안산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염소가 5곳, 어량이 5곳이 있었다고 하여 어염업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송어가 나며 민어, 숭어, 조기, 농어, 참치, 홍어, 큰새우, 중새우, 모시조개, 미네굴, 굴, 낙지가 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는 안산의 물산으로 주로 밴댕이, 숭어, 조기, 황조기, 뱅어, 전어, 호독어, 오징어, 낙지, 해양, 조개, 가무락조개, 맛조개, 굴, 미네굴, 소라, 게, 청게, 큰새우, 중새우, 쌀새우, 자하, 어표, 사자족애 등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염선세(魚鹽船稅)로 124량 4전 5분을 납부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어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에 따른 이익이 커지자 궁방(宮房)이나 아문(衙門)들이 이들 지역을 절수(折受)하여 이익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어장(漁場)의 절수에 따른 폐단이 심화되자 정부에서는 인천에 있는 내수사의 옹암 어전(漁箭), 용유 염분(鹽盆)의 각 궁방의 절수를 폐지하였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을 실시하여 각 궁방과 아문이 절수하여 수세하고 있었던 어염선세를 국가 기관인 균역청에서 징수하는 혁신적 조처를 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왕실의 외척이 정권을 농단하는 세도 정치가 행해지고, 그에 따라 국가의 중앙 집권력이 약해지자 궁방과 아문 등이 다시 어전과 염분을 절수하면서 수세함으로써 균역청은 어염선세를 징수할 수 없게 되었다.

[제언 수축과 간석지 개간]

지금의 시흥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이미 대규모 개척 사업이 진행되었고, 제언·보 등의 수리 시설이 축조되었다. 17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황폐한 진전(陳田)[묵정밭]을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여 저습지(低濕地)나 해택지(海澤地)[갯벌]를 활발히 개간하였다. 안산과 인천 사이의 해안가 땅은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 쪽은 바다로 뚫려 있는 형세를 이용하여 제언을 쌓아 물길을 조정하였다.

1848년(헌종 14) 5월 경기감영에서 작성한 『경기도각읍제언도결성책(京畿道各邑堤堰都結成冊)』에 따르면, 안산군 대월면 석곡리에 조자언(鳥觜堰)이 있었으며 인천 지역에는 신현면에 1개, 황등천면에 1개, 전반면에 2개 등 모두 4개의 제언이 설치되었다. 이들 제언 설치와 운영 형태는 조선 후기 수리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시흥 지역의 개간과 농업 생산력이 제언을 통한 수리 정책의 진전을 통해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인천 연해는 평균 10m가 넘는 조수의 차를 보이며, 그에 따라 해안 지대마다 광활한 갯벌[간석지]이 발달되어 있다. 또한 들고 남이 심한 해안 지형은 갯벌의 개발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으로 일찍부터 해택 개발이 시작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인천 연안 지역의 해택은 경작지로 개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인천 연안 지역의 해택 개발 사례는 많지 않고, 주로 인천과 남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대적인 농지 개간을 단행하였다. 초기에는 국고의 부족으로 진전 개간에 주력하였고, 점차 제언의 축조를 통한 해택의 개발이 활발해졌다. 17세기 후반 강화도에서는 간척 사업을 통해 확보한 경지를 통하여 강화도 방비에 투입할 군병을 확충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제언의 축조와 관리를 담당했던 관청을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 구황책과 연관하여 해택을 개발하였다. 1721년(경종 1) 진휼청에서 인천, 안산 경계에 있던 석장포(石場浦)에 제방을 쌓아 제방 안의 개간지를 관리하여 수백 섬지기의 전답을 얻어 진휼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교통과 통신]

조선시대 인천부에서 동쪽으로 35리[약 14㎞] 떨어진 곳에 중림역(重林驛)이 있었다. 중림역은 1424년(세종 6)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역에 속하였다. 1530년(중종 25)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인천)부의 서쪽 33리[약 13㎞]에 있으며 중림역도에 경신(慶信), 반유(盤乳), 석곡(石谷)[안산에 있던 역], 금륜(金輪)[부평에 있던 역], 종생(終生), 남산(南山)의 6개 역이 속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는 “(인천)부의 동쪽 30리[약 12㎞]에 있으며 대마(大馬) 2필, 기마(騎馬) 3필, 복마(卜馬) 3필, 노비 55명, 역리(驛吏) 13명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산의 역원 시설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석곡역(石谷驛)이 나타나는데, 안산군의 서쪽 7리[약 2.8㎞]에 있고, 역마 8필과 노비 33명이 있다고 하였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산군의 남쪽 5리[약 2㎞]에 쌍록원(雙鹿院)이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은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안산군에는 봉수(烽燧)가 2곳 있었는데, 이 중 오질애(五叱哀) 봉수가 지금의 시흥 지역에 설치되었다. 오질애 봉수는 안산군 서쪽에 있었으며 남쪽으로 무응고리(無應古里)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인천 성산(城山)에 응하고 있었다. 무응고리 봉수도 안산군 서쪽에 있었으며 남쪽으로 남양 해운산(海雲山)에 응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시기에 오면 오질애 봉수는 오질이도(五叱耳島) 봉수로 개칭되었고, 무응고리 봉수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여지도서』 단계에 이르면 오질이도 봉수가 정왕산(正往山) 봉수로 옮겨 간다. 마유면에 있는 정왕산은 안산군 서쪽 30리[약 12㎞]에 있으며 정왕산 봉수는 남쪽으로 남양 해운산과 응하고, 북쪽으로 인천 성산과 응하고 있었다. 정왕산 봉수는 1894년(고종 31)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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