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01
한자 安山郡
영어공식명칭 Ansangun
이칭/별칭 연성(蓮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고대,고려,조선,근대
집필자 이우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940년연표보기 - 장구군에서 안산군으로 개칭
개정 시기/일시 1914년 - 안산군 시흥군과 수원군에 분할 편입

[정의]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남부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할하였던 행정구역.

[개설]

안산군은 지금의 시흥시 남부를 비롯해서 안산시 일원과 수원시 권선구 입북동, 군포시 대야동, 의왕시 부곡동 일부 등이 해당되는 행정구역이다. 고을의 치소(治所)인 읍치(邑治)는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있었다.

[내용]

경기도 시흥시 남부가 속해 있던 안산군은 서해안 시화호 일대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예로부터 서해안 방어의 군사적 요충지이자 연안 항로의 중요한 요지였다. 고려 때 안산 잿머리의 포구는 큰 배들이 오갈 수 있는 외항으로 축조되었다. 972년(광종 23) 십수 년간 단절된 중국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서희(徐熙)[942~998]가 사신으로 송에 다녀왔는데, 서희가 송나라로 출발할 때 안산 잿머리를 이용하였다. 이때 서희가 출발하기 전 성황당(城隍堂)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여기에서 시흥 군자봉 성황제가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안산군에는 여러 사대부가 살았다.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에는 강희안(姜希顔)[1417~1464]과 강희맹(姜希孟)[1424~1483] 형제, 조선 중기에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金瑬)[1571~1648]와 장유(張維)[1587~1638], 조선 후기에는 이익(李瀷)[1681~1763]과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이 안산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안산이라는 지명 외에 세조 때부터는 연성(蓮城)이라고도 흔히 불렸다. 연성이라고 불린 이유는 1463년(세조 9)에 강희맹이 사신으로 중국 명나라의 수도 난징[남경(南京)]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전당홍(錢塘紅) 연꽃 씨를 가지고 와 관곡지(官谷池)에 심었기 때문이다.

[변천]

안산군의 처음 이름은 장항구(獐項口) 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였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 장구군(獐口郡)으로 되었다. 고려 초기 940년(태조 23) 장구군에서 안산군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수주(水州)[지금의 수원시]의 속현이 되어 안산현이 되었다. 고려 후기인 1390년(공양왕 2) 경기도가 좌·우도로 분할되었을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었을 때 시흥군인천부에 예속되었다. 다음 해인 1896년(고종 33) 13도제가 부활하면서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시흥군과 수원군에 분할 편입되었다. 1995년 시흥시 화정동 일부와 장상동, 장하동, 수암동이 편입되어 지금의 안산시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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