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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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池德海 |
영어음역 | Ji Deokh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재학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자는 수오(受吾), 호는 뇌봉(雷峯)이다. 부원군 지용기(池湧奇)의 8세손으로 청원군 남일면 은행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지경청(池景淸)이고,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지란(池蘭), 증조할아버지는 지영수(池永洙), 외할아버지는 송수(宋璲)이다. 부인은 윤직방(尹直方)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며, 재취한 부인은 성산이씨 이구(李竘)의 딸이다. 당시 지덕해의 여덟 종형제가 모두 관직에 있었기에 세상에서‘ 팔해(八海), 구춘(九春), 일찬(一撰), 일서(一書)라고 불렀다.
[활동사항]
이춘영(李春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613년 생원으로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강화에서 살해되고 폐모론이 대두되는 때 유생들이 폐모론에 가담하여 벼슬을 얻으려는 것을 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 후 1624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 저작(著作)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그 뒤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향리에 머물고 있던 중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를 전주(全州)로 배위하여 『분조일기(分朝日記)』 4권을 기록해 올렸다. 뒤에 전적·양재도찰방·예조와 병조의 좌랑, 용강현령, 예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으며, 1632년 사헌부 정언으로 있을 때 사친추승(私親追崇:인조의 부친을 추존하는 일)을 반대한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권도(權濤) 등이 화를 당하자 간언의 임무를 하는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고 상소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 뒤 병조정랑·춘추관·기주관·사예·장령·영해부사를 거쳐 정언에 기용되어 상경하는 도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좌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어 병사와 식량모집에 힘썼다. 이듬해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외가가 있는 회덕 백달촌(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으로 가서 북벌론을 주장하며 만년을 보냈다.
[상훈과 추모]
1641년에 죽었으며,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묘소]
공주목 유성현 탄동(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탄동)에 있다. 우암(尤庵)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쓴 묘비가 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