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박홍원 충효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476
한자 義兵將朴弘遠忠孝碑
영어음역 Uibyeongjang Park Hongwon Chunghyobi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for Volunteer Army Commander Park Hongwon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636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재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인물 박홍원(朴弘遠)[1606~?]
건립시기/연도 1993년연표보기
높이 191㎝
너비 63㎝
소유자 순천박씨(順天朴氏) 문중
관리자 박상일
금석문찬자 박대영(朴大永)
금석문서자 이희주(李熙周)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에 있는 의병장 박홍원(朴弘遠)[1606~?]의 비석.

[개설]

1993년에 박홍원의 후손인 박화순(朴樺淳) 등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헌한 박홍원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박홍원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상거(象巨)이고, 아버지는 박동명(朴東命)[1576~1636], 할아버지는 박춘무(朴春茂)[1544~1611]이다.

[위치]

청주시내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청주 IC로 가는 청주가로수길로 접어들면 오른쪽 부모산 자락에 주봉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주봉마을 입구의 길가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비석은 1단의 화강석 지대석 위에 거북대좌를 만들고, 그 위에 높이 191㎝, 폭 63㎝, 두께30㎝의 오석의 비신을 세웠으며,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서로 다투는 모습의 이수를 얹어 비갈형태를 띠고 있는 용첩비이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4면비이며 주위에는 철제 보호난간을 낮게 둘렀다.

[금석문]

비신의 전면에는 “倡義將朴弘遠先生忠孝碑(창의장박홍원선생충효비)”라고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박대영(朴大永)이 지었고, 글씨는 이희주(李熙周)가 썼다.

창의장박홍원선생충효비에는 그의 가계와 선조들의 업적, 그리고 설립 배경이 국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청주의 의병장으로 조헌(趙憲)[1544~1592]과 함께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조부 박춘무의 업적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군(淸軍)과 싸우다 전사한 부친 박동명의 업적에 이어 박홍원의 활동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활동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홍원은 가정에서 학습하여 경전을 통달하였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인하여 직접 의병을 지휘할 수 없게 되자 아들 박홍원에게 명하여 의병을 이끌게 하였다. 박홍원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의병을 거느리고 경기도 안현(鞍峴)으로 가서 도원수 장만(張晩)의 관군을 도와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승리 후 박홍원은 즉시 귀가하여 병석의 아버지께 승리를 고하자 아버지는 기뻐하여 말하길 ‘너는 과연 충효를 다했다’고 찬양하더니 점차 병환이 나아졌다고 한다. 박홍원은 정부로부터 관직을 받지는 못하고 다만 진무원종1등훈(振武原從一等勳)을 얻었다.

박홍원은 노모(老母)의 병환으로 인하여 병자호란 때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여 전사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것을 큰 불효로 여겼으며, 자손들에게 자신의 훈공(勳功)으로 영화를 누리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하여 손자 박천석(朴天錫)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을 때에도 조부 박홍원의 업적을 상달(上達)하지 않아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박춘무, 병자호란 때의 의병장 박동명, 이괄의 난 때 활약한 박홍원을 배출한 순천박씨(順天朴氏) 집안을 인근에선 삼대창의가(三代倡義家)라고 하는데, 순천박씨 문중의 화합을 도모하고 충효의 교육 장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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