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 성씨로 보는 조선시대 시흥 사대부의 혼맥과 학맥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206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현희

[조선시대 시흥 사대부 가문]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는 조선시대 인천과 안산에 속해 있었다. 조선 초기 인천에는 이(李)·공(貢)·하(河)·채(蔡)·전(全)·문(門)의 토착 성씨가 있었고, 내성(來姓)으로 박(朴)이 있었으며, 망성(亡姓)으로 최(崔)가 있었다. 안산에는 김(金)·안(安)·방(方)의 토착 성씨와 망성으로 임(林)이 있었다. 이들 토성 중 안산의 안산 김씨(安山金氏)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씨가 조선 초기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이족(吏族)으로 전락하였다. 15세기 시흥 지역에는 토착 성씨인 안산 김씨가 주요 사대부 가문으로 세거하였으며 여기에 진주 강씨(晉州姜氏)진양 하씨(晉陽河氏)가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이 시기의 사대부들은 훈구적인 성향을 띠었다.

16세기 들어 사림 세력이 점차 중앙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정치적 상황은 시흥 지역 사대부의 판도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훈구적 성향을 보이던 안산 김씨는 정치적으로 위축되어 갔으며, 진주 강씨는 시대 변화에 부응하며 사림의 성향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 시기에 이거해 온 창녕 성씨(昌寧成氏)도 사림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서인(西人)의 당색을 띠게 되었다. 17세기 들어 시흥 지역은 정치적으로 사림 계열 인물들의 주요한 지역 기반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사림계 사대부 가문이 대거 이전해 왔으며 사림 정국이 분화됨에 따라 서인, 북인(北人), 남인(南人), 노론(老論), 소론(少論) 등 당색별로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 주목되는 사대부 가문은 문화 류씨(文化柳氏), 청주 한씨(淸州韓氏), 안동 권씨(安東權氏), 덕수 장씨(德水張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들 수 있다.

[안산 김씨]

안산 김씨는 13세기 후반에 출사한 김위(金渭)를 1세대로 하는 가문으로 김위의 증손 김정경(金定卿)[1345~1419] 때 와서 훈척 가문(勳戚家門)으로 성장하였다. 김정경은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 창업을 지지하였고, 1400년(정종 2)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을 지지하여 그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과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김정경의 아들 김개(金漑)도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면서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까지 올랐다.

이처럼 15세기에 안산 김씨의 성장은 일찍부터 맺어온 유력 세력과의 혼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고려 말 판삼사(判三司)를 지낸 김원상(金元祥)은 수정승(守政丞)을 역임한 민지(閔漬)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아들 김성경(金星慶)의 처가인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고려 말 조인규(趙仁規)로 대표되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유력한 가문과 혼인을 맺었다. 김정경의 처가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장인 신익지(申翼之)는 고려조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한 인물이었고, 조카인 신개(申槪)는 세종 조에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김정경의 아들인 김척(金滌)은 이조판서 권맹손(權孟孫)의 딸과 혼인하였고, 김한(金瀚)은 정종의 부마(駙馬)였다.

고려 후기 세족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안산 김씨는 조선의 건국에 협조함으로써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격변기에도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시흥 지역에 사림 세력의 흥기(興起)에 따라 훈구 세력이던 안산 김씨는 정치적으로 위축되어 갔다.

[진주 강씨]

진주 강씨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강계용(姜啓庸)이 가문의 시조(始祖)이며 고려 말에 경상도 지역을 지역 기반으로 하다가 조선 초기 관직에 진출하면서 경기도 일대에 세거지를 마련하였다. 현조(顯祖)는 강회백(姜淮伯)[1357~1402]으로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하였으며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급진 신진사대부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는 등 정치적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 복권되어 관직에 제수되었다.

강회백 이후 그의 자손들은 관직으로 현달(顯達)하며 유력한 정치 집단을 형성하였다. 아들인 강진덕(姜進德)은 장령(掌令)을, 강석덕(姜碩德)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손자 대의 강맹경(姜孟卿)은 영의정을, 강희안(姜希顔)은 부윤(府尹)을, 강희맹(姜希孟)은 찬성(贊成)을 역임하였다. 또한 강희맹은 세조 대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봉되었으며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강희맹의 아들 강구손(姜龜孫)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청송 심씨(靑松沈氏)와 안성 이씨(安城李氏) 등 태종 대의 유력 가문과 세조 대 훈구의 정점에 있었던 여러 정치 세력과 혼인을 맺어 진주 강씨 가문은 정치적으로 중앙 훈구계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강순덕(姜順德)의 처부(妻父)였던 이숙번(李叔蕃)이 안산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는데, 당시 균분 상속(均分相續)이라는 관행에 따라 처가의 재산을 사위인 강순덕이 분급받아 시흥 일대에 진주 강씨의 지역 기반을 마련하였다.

16세기 들어 진주 강씨는 훈구 세력에서 사림 세력으로 변화해 갔다. 강희맹에서 강구손으로 내려오는 계통을 잇고 있는 강극성(姜克誠)은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16세기 등장한 사림파의 개혁 이념을 계승하였다. 이로 인해 강형(姜詗)이 연산군 대의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피화(被禍)되었으며, 강사상(姜士尙)이 선조 대에 좌의정을 지내며 사림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진양 하씨]

진양 하씨는 진주(晉州)를 토성으로 하며 고려 말 중앙에 진출하여 활동하다가 조선에 들어와 경기도 일대에 자리잡았다. 시흥 지역의 입향조는 하연(河演)[1376~1453]이다. 하연의 처가는 권문세족의 일원이었던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처부인 이존성(李存性)은 고려 말 이성계가 이인임(李仁任) 일파를 숙청할 때 족당(族黨)으로 연루되어 장살(杖殺)을 당하는 등 일련의 위기가 있었다. 하연의 아버지 하백종(河白宗)은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절의를 지키며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하연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세종 즉위 이후 대사헌으로서 척불(斥佛)의 기치 아래 불교 사찰의 혁파를 주도하였고, 연분 9등(年分九等)과 전분 6등(田分六等)을 내용으로 하는 공세법(貢稅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하연은 ‘승평수문(昇平守文)’의 명재상으로 일컬어졌고 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1453년(단종 1) 하연이 죽자 후손들은 묘소를 소래산에 마련하였으며 이후 이곳에 세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영당(影堂)이 불타자 후손들은 하연의 영정을 고향인 경상도 합천으로 옮기고 채진당(采眞堂)이란 영당을 건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소래산 일대는 진양 하씨들에게 한때의 우거처(寓居處)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창녕 성씨]

창녕 성씨는 고려시대 호장(戶長)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창녕과 양주, 장단 일대를 기반으로 하다가 15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시흥 소래산 인근에 정착하였다. 시흥 지역의 입향조는 호조좌랑(戶曹佐郞) 성완(成玩)[1436~1500]으로 15세기 후반 성찬(成瓚), 성완 형제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특히 성찬은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딸과 혼인하여 종실(宗室)과 관계를 맺었다. 성찬의 아들 성희안(成希顔)은 연산군 때 박원종(朴元宗), 류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 중종반정을 주도하였다. 이후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봉되었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성희안의 동생 성희옹(成熙雍)과 아들 성율(成瑮)도 정국공신에 책봉되어 가문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6세기 이래 사림 세력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학문 교류를 통해 경기 지역의 유력한 사족을 사림 성향으로 견인하고 있었는데, 창녕 성씨 가문도 이런 사림의 영향을 받았다. 성완의 손자 성세장(成世章)이 사림계 유현(儒賢) 김안국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사림 성향으로 변하였다.

시흥 지역에 세거했던 창녕 성씨는 이후 사림의 명사들과 혼인 및 학문적 교류 관계를 이어나갔다. 관직으로 전대의 현달을 재현하지 못하였으나, 17세기 사림 정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붕당의 분립 과정에서 서인의 당색을 지니며 활동하였다.

[문화 류씨]

문화 류씨는 16세기 후반 류수천(柳壽千)과 류잠(柳潛)을 잇는 계파가 시흥 지역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류잠의 외할아버지는 부사(府使) 김성동(金誠童)으로 세조 대 좌익공신(佐翼功臣)이며 우의정이었던 김질(金礩)의 아들이다. 처모(妻母)는 16세기 시흥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이자 훈구 세력인 강희맹의 딸이다. 진주 강씨와의 혼인을 계기로 문화 류씨가 시흥 지역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류자신(柳自新)[1541~1612] 대에 이르러 그의 딸이 광해군의 비(妃)가 되어 가문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광해군 대 문화 류씨의 성세는 류희빙(柳希聘)이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고, 류희분(柳希奮)이 병조판서, 류희발(柳希發)이 이조참판, 류희량(柳希亮)이 예조참판, 류효립(柳孝立)이 도승지를 각각 역임하였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시기 문화 류씨는 류희분을 중심으로 북인 가운데 대북(大北)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다. 류희분은 외숙부인 정창연(鄭昌衍)을 비롯하여 박승종(朴承宗)·박자립(朴自立) 부자 등 왕실과 연결된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아울러 대북의 또 다른 핵심 세력인 이이첨(李爾瞻) 세력과 연합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주장하여 이를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후일 인조반정이 발발하여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가문이 일거에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반정 후 류희분 등은 참형에 처해졌고, 1628년(인조 6) 류효립 등이 가담한 광해군 복위 사건은 가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청주 한씨]

청주 한씨는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17세기 한백겸(韓百謙)과 한준겸(韓浚謙)[1557~1627] 형제 대에 중앙 정계에 전면 등장하였다. 아버지 한효윤(韓孝胤)이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박민헌(朴民獻)에게서 역학을 전수받았으며, 이 같은 가학(家學)은 한백겸이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학문을 전수받는 사승(師承) 관계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청주 한씨는 서경덕의 문인들이 결집된 북인의 당색으로 활동하였다. 북인의 당색으로 활동한 청주 한씨는 선조~광해군 연간 거듭된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중앙 정계의 서인과 북인 간의 갈등은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촉발시켰다.

옥사의 처결 과정에서 한백겸·한준겸 형제도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수개월 후 풀려나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던 강원도 원주에 은거하였다. 한준겸은 선조 말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 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1613년(광해군 5) 대북의 공격으로 전리 방귀(田里放歸)되었다. 불우한 처지에 놓인 청주 한씨는 원주·양주 등지의 별서(別墅)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실학자 한백겸의 여러 저술은 은거기의 학문적 바탕으로 펼쳐졌다.

한준겸의 딸이 인조의 비가 되었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계기로 재기하여 한준겸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제수되었고,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韓興一)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청주 한씨는 북인 계열의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서인이 주축이었던 정국에서 뚜렷한 정치적 행적을 남겼다. 청주 한씨 문익공파(文翼公派) 가문이 경기도 안산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 1636년(인조 14) 인조의 사패지 하사로 강원도 원주에 있던 한준겸의 묘를 안산 대월면 거모포[지금의 시흥시 거모동]로 옮겨오면서부터이다.

[안동 권씨]

안동 권씨청주 한씨와 함께 17세기 북인으로 정치 활동을 본격화한 가문이다. 일찍이 권협(權悏)[1553~1618]에 의해 북인의 당색으로 알려졌으며 소북(小北)의 영수(領袖)였던 유영경(柳永慶)과의 혼맥(婚脈)과 권대임(權大任)이 선조의 부마로서 국혼 등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 가문이 시흥 지역에 기반을 마련한 때는 17세기 초반이었다. 가문의 현조인 권협이 죽은 이후 부평 수탄리에 장사 지냈고, 이후 인천 도곡과 안산 일대를 가문의 묘산이자 재향 기반으로 운영하였다. 권협의 손자 대에 이르러 안동 권씨는 남인의 핵심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학문적으로도 기호(畿湖) 남인 학맥의 중심 인물들인 조경(趙絅)·허목(許穆) 등과 교유하였고, 남인계 붕당의 핵심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즉, 숙종 연간 남인의 영수로 우의정을 지낸 권대운(權大運), 호조판서를 역임한 권대재(權大載), 대사성을 지낸 권환(權瑍)과 권규(權珪), 대사헌을 지낸 권해(權瑎)이다.

안동 권씨가 남인으로 활동했던 숙종 대는 환국(換局)의 시기로 안동 권씨의 정치적 성쇠 역시 빈빈했던 환국에 큰 영향을 받았다. 남인계의 핵심 정치 세력으로 반대 당파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들의 정치 행적은 서인들의 집요한 공격을 야기하였고, 숙종 대 후반 들어 서인들의 정치적 우위가 확립되어 가면서 안동 권씨의 쇠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덕수 장씨]

덕수 장씨는 장순룡(張舜龍)을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조선 건국을 전후하여 과천 일대에 정착하였다. 조선 초기 장충보(張忠輔)[1458~1512] 대에 과천 방배곡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 장충보, 장옥(張玉) 부자 대에 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며 양천 허씨(陽川許씨), 동래 정씨(東萊鄭氏) 등 중앙 관인(官人) 가문과 혼인을 맺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 덕수 장씨는 문과 급제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였고, 장운익(張雲翼)이 선조 연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세기에 장유(張維)와 장신(張紳)이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됨으로써 가문이 번성하였다.

덕수 장씨는 서인의 핵심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장유는 서인 내에서도 공서파(功西派)의 입장에서 현실론을 강조하였다. 1631년(인조 9)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장유의 딸과 혼인을 맺었다.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장유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서인계의 유력한 가문인 안동 김씨(安東金氏), 광산 김씨(光山金氏), 전주 이씨(全州李氏) 등과 혼인을 맺었다. 장유의 처부는 인조 연간 우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김상용(金尙容)이고, 장선징(張善徵)의 사위는 숙종 연간 좌의정을 역임한 전주 이씨 이관명(李觀命)이다. 서인계 학맥의 종장(宗匠)이었던 김장생(金長生)의 현손(玄孫)인 김진서(金鎭瑞)도 장선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반남 박씨]

반남 박씨 가계 중 시흥 지역으로 이거한 계파는 박응복(朴應福)-박동량(朴東亮)[1569~1635] 계파이다. 박응복은 중종 대 기묘 사류(己卯士類)의 한 사람인 박소(朴紹)의 아들로 선조 연간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반남 박씨는 16세기 후반 연이은 국혼을 통해 외척가로 부상하였다. 박응복의 형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이 선조의 장인이었고, 손자인 박미(朴瀰)는 선조의 부마로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박동량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과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국왕의 지원을 바탕으로 박동량은 한응인(韓應寅), 유영경, 서성(徐省),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과 함께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 칠신의 한 사람이었다.

반남 박씨는 정치적으로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교유하거나 혼인을 맺었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서인의 중심 인물과 가문이었다. 광해군 대에 한때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였지만 인조반정으로 서인 정국이 전개되자 유력한 정치 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풍양 조씨(豊壤趙氏), 부여 서씨(扶餘徐氏) 등 17세기 경세 관료적인 성향이 강한 한당(漢黨) 계열의 가문과 혼인을 맺었다. 이들 한당은 왕실과 혼인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서울·경기 지역에 세거의 기반을 가진 관료 집단으로서 호서(湖西) 지역을 기반으로 한 김집(金集), 송시열 계열의 산당(山黨)과 구분되는 경세론을 주장하며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가문의 정치적 성향은 박세채(朴世采)에 의해 18세기 주요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는 탕평론(蕩平論)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17세기 후반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될 때 박미, 박세교(朴世橋)의 후손들은 노론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영조 연간의 박필주(朴弼周)는 산림(山林)으로서 당시 노론 내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18세기 학계의 큰 화두이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즉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이재(李縡), 김원행(金元行), 어유봉(魚有鳳) 등과 함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는 낙론(洛論)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파평 윤씨]

파평 윤씨 가문이 시흥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윤사로(尹師路)의 손자인 윤승유(尹承柳)[1475~1505]에 이르러서이다. 윤승유가 죽은 후 안산 수리산에 그의 장지를 마련하였고, 이후 이곳이 가문의 세장지(世葬地)가 되었다. 윤승유의 부인은 이조판서 이계남(李係男)의 딸이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친오빠인 윤사윤(尹士昀)의 외손녀로 당대의 거부였으며, 윤승유의 가문도 선대부터 집안이 풍족하였다. 윤승유 당대에도 파평 윤씨의 경제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 전기 왕실 등과 유력한 혼인을 맺으며 훈구 계열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파평 윤씨의 가문 성향은 16세기에 들어 사림의 성향으로 변화하였다. 윤엄(尹儼)은 대사헌 김주(金澍)의 사위였는데, 김주는 명종·선조 연간 사림계의 유현으로 존경받던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와 친밀히 교유하였다. 윤엄의 아들 윤민일(尹民逸)은 당시 학문적 명망이 높던 성혼(成渾)을 사사하면서 가문의 분위기를 사림적 성향으로 선도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 정치적으로 현달했던 파평 윤씨는 서인으로 그리고 서인의 분립 이후에는 소론으로 활동하였다.

[혼인으로 다진 사대부의 출셋길]

조선시대 시흥 지역의 사대부 가문은 국혼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 경우가 많았다. 국왕에게서 받은 사패지에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후손들이 세거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청주 한씨, 선조의 장인인 박응순의 반남 박씨 그리고 효종의 장인으로 서인계의 주요한 정치 세력으로 활동한 장유덕수 장씨이다. 이들은 모두 이거 성씨로 국혼과 관직으로 현달한 지위를 통해 시흥 지역을 대표하는 사대부 가문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유력한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고 문벌(門閥)로서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가문의 흥망이 중앙 정계의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경기 지역의 특수성이 시흥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또한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살펴보면 15세기에는 훈구계, 16세기에는 사림계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7세기 이후로는 북인, 남인 및 서인의 당색을 지닌 가문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 서인계였던 반남 박씨덕수 장씨가 중앙 정계에서 주도적인 정파로 활동함으로써 이 지역 사대부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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