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같은 이름, 시흥의 지명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18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심우일

[개설]

경기도 시흥시의 행정동 명칭과 자연 마을의 이름에는 낯설지만 정겨운 순우리말의 뜻과 함께 마을의 역사와 인물, 자연환경의 특색 등을 내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자연 마을이 사라지고 있지만, 마을을 부르던 이름만은 남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행정동 명칭과 자연 마을 이름의 역사]

신천동은 신촌(新村)의 앞 글자 신(新), 사천(蛇川)의 뒷 글자 천(川)을 합쳐서 1914년에 만든 이름이다. 신촌의 순우리말은 새말이다. 이 마을은 본래 산 구석에 있어 범죄에 취약해 19세기 초에 넓은 벌판인 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843-19 새말공원 일대로 터전을 옮기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새말이라고 했다.

사천의 순우리말은 뱀내이다. 이 마을 옆으로 흐르는 하천의 모양이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시흥시 대야동 498-16 일대의 마을이다. 또한 이 마을에는 매달 1일과 6일에 제법 큰 우시장이 섰고, 사람들은 이 장을 뱀내장[蛇川場]이라고 불렀다.

과림동은 목과(木果)의 앞 글자 목(木), 중림(重林)의 뒷 글자 림(林)을 합쳐서 1914년에 만든 이름이다. 목과의 순우리말은 모갈이며 모가울·모과울이라고도 하였다. 시흥시 과림동 635 일대의 마을이다. 마을에 포도와 복숭아 등의 과일 나무가 많아서 모과울이라고 불렀고, 이를 목과라는 한자 표기를 하면서 모갈이라고 불렀다.

중림은 시흥시 과림동 345-6 일대의 마을로 서쪽을 안말, 동쪽을 아랫말, 중앙을 가운뎃말이라고 부른다. 특히 안말은 조선시대 중림역이 있던 곳이다. 마을 명칭은 마을 주변에 있는 산의 숲이 우거져서 나무가 아주 많았다는 특성을 반영하여 ‘거듭’이라는 뜻의 중(重)과 숲이라는 뜻의 림(林)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장곡동은 장하(長下)의 앞 글자 장(長), 응곡(鷹谷)의 뒷 글자 곡(谷)을 합쳐서 1912년에 만든 이름이다. 장하의 순우리말은 긴마루 또는 진마루이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는 한자로 긴 장(長), 마루 종(宗)을 써서 장종(長宗)이라고도 불렀다. 마을 명칭은 마을의 형태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흥시 장곡동 826 일대의 마을이었다.

응곡의 순우리말은 매꼴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 매가 꿩 사냥을 하는 형국이라서 이렇게 불렀다. 한자로는 매 응(鷹), 골짜기 곡(谷)을 썼다. 시흥시 장곡동 805 일대의 마을이었으며 마을의 동남쪽으로 지금도 노루우물이 있다.

매화동의 순우리말은 매체기다. 음이 유사한 한자로 변환하여 매착(梅着)이라고 표기했다가 1914년 매화(梅花)로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시흥시 매화동 240-6 일대의 마을이다. 마을 명칭에 대한 설이 각양각색이다. 마을 형세가 매화꽃이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라는 설, 밤에 호조벌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마치 동네의 호롱 불빛이 매화 꽃잎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설, 호조벌 간척 사업이 있기 전에 썰물이 지나간 자리가 매화꽃이 떨어진 듯한 무늬를 남겼다는 설 등이 있다.

[자연환경의 특색이 보이는 마을 이름]

과림동 부라위는 풍수적으로 마을 형국이 소(牛)와 관련이 있다. 특히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는 소의 뿔에 해당한다고 하여 뿔바위라고 불렀으며 마을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마을 이름은 뿔바위가 어음 변화로 부라위가 된 것이다. 한자 표기는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불아위(佛阿尉), 순우리말을 한자화한 각암(角岩)이 있다.

과림동 숯두루지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흑연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탄평(炭坪) 또는 숯두루지라 부르고 있다. 마을 뒷산을 범이 많아 범재산, 산세가 좋아 이곳에 살면 장수한다는 의미로 만수산이라고도 칭하였다. 이 산에서 검은 돌이 많이 나는데, 숯처럼 검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숯두루지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검은 돌에서 흑연을 채취하는 오류광산이 마을에 있었다.

배나루시흥시 정왕동 824-2 일대의 마을이다. 한자로는 이진(梨津)이다. 1920년대 초 군자염전이 축조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다. 그래서 마을의 주요 교통수단은 배였고, 마을은 나루터 역할을 하였다.

섬말은 과거에 바다와 갯벌로 싸인 섬이었으나, 섬 주변의 갯벌이 간척 사업을 통해 옥련들, 국께들과 같은 농경지로 바뀌면서 육지가 되었다. 시흥시 장곡동 24-3 일대의 마을로, 한자로는 도촌(島村)이라고 했다. 매년 음력 정월 길일을 택해서 당제를 지냈다.

나분들이라는 마을 명칭은 보통천을 끼고 마을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에서 유래하였다. 넓은 들이라는 의미를 광석(廣石)이라는 한자를 빌려 표기하였으며 시흥시 광석동 126-6 일대의 마을이다. 하동 정씨(河東鄭氏)가 대대로 세거해 온 마을이며 조선 말기에는 광석장(廣石場)이 서기도 하였다.

살미의 한자 표기는 미산(米山)이다. 1914년에 공식적으로 마을 명칭을 미산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호조벌이 생기면서 쌀이 많이 나는 동네라는 의미로 마을 명칭이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다. 시흥시 미산동 334-3 일대의 마을이다.

[역사, 인물과 관련된 지명]

능골은 한자로 능곡(陵谷)이라고 표기하며 시흥시 능곡동 617 일원이다.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묘를 이 마을에 쓰려고 능터를 잡았다가 쓰지 않았는데, 후대에 광해군의 장인이 되는 류자신(柳自新)이 이곳에 묻혀 마을 이름도 능골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사당인 영모재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평안촌(平安村)은 염전과 관계가 깊다. 1920년대 초 갯벌이었던 이곳에 천일염전인 군자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외지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왔는데, 특히 평안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자역 주변에 동향촌(同鄕村)을 이루어 모여 살았으며 마을 명칭도 평안도 출신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로 평안촌이라고 하였다. 시흥시 정왕동 2319-1 일대이다.

복음자리는 한자 복음(福音)과 한글 '자리'가 결합한 마을명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깃드는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1975년 말 도시 빈민 운동가 제정구(諸廷坵)정일우(鄭日祐)[John Vincent Daly] 신부가 서울 양평동 판자촌에 철거민들과 거주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붙여준 이름이다. 1977년 서울시 양평동, 문래동의 안양천 주변 철거민들이 제정구정일우 신부의 주선으로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946 일대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므로 복음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흥동(新興洞)은 시흥시 신천동 815-26 일대의 마을로 과거에 언덕 형태의 구릉지로서 붉은 황토가 많아서 '붉은덕지'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이후 황해도 연백군과 옹진군의 피란민들이 대거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들의 초창기 정착 생활은 형편이 어려웠다. 집에 있을 여유가 없고 생계를 위해서 이곳저곳으로 삶의 현장을 누벼야 했기에 마을 명칭도 현장마을이라고 하였다. 이후 새롭게 정착하여 흥성하길 바란다는 의미의 신흥동으로 변경하였다.

신촌(新村)은 새롭게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순우리말로는 새말이다. 장곡동월곶동의 경계 지점인 시흥시 장곡동 750-2 일대의 마을이다. 이곳에 새롭게 정착한 사람들은 소래염전이 삶의 터전이었다. 이렇게 염전에서 염부로 일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 또 있다. 시흥시 포동 338-1 일대의 신촌이다. 이곳은 가구 수가 장곡동의 신촌보다 훨씬 많다. 염전이 아닌 들판에서 농사를 짓는 농업과 관계된 신촌도 있다. 시흥시 신천동 843-19 새말공원 일대의 마을이다. 마을 주변에 간척 사업으로 넓은 들판이 형성되면서 새롭게 사람들이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오면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라고 할 만큼 저지대로서 논농사 짓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

[알쏭달쏭 생소한 마을 이름]

더푼물의 지명 유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마을 앞의 문봉이 풍수적으로 마을을 덮어 누르는 형국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마을에서 안양시 박달동으로 넘어가는 범고개 마루턱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왕래하는 사람과 마차 때문에 먼지가 많이 나서 우물을 항상 덮었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시흥시 목감동 2-3 일원이다.

강챙이는 한자로 강창리(江倉里)이라고 표기한다. 시흥시 도창동 184-4 일원으로 조선시대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배에서 짐을 내려 이 마을 창고에 쌓았다고 하여 명명된 것이다. 강(江)은 바다를, 창(倉)은 창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배곧은 순우리말이다. ‘배우는 곳’이란 뜻이다. 1914년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조선어학당의 이름을 ‘한글배곧’으로 바꾸면서 유래하였다. 시흥시에서 군자지구 신도시 개발에 따른 지명을 공모하여 결정하였다. 신도시에 서울대학교 시흥스마트캠퍼스가 자리하고, 시흥시가 지성과 학문을 겸비한 교육 도시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취지를 살려 상징성이 강한 명칭으로 배곧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구준물은 우물과 관계가 깊다. 조선 초에 9년간 가뭄이 계속되자 마을 사람들이 9개의 우물을 파서 그 물을 길어다 마셨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금은 9개의 우물이 모두 존재하지는 않는다. 시흥시 군자동 373 일대의 마을이며 한자로는 구정(九井), 구지정(九之井)이라고 표기한다.

[사라지는 마을, 남아 있는 이름]

검바위는 금바위라고도 부르며 한자로 검암(儉岩), 금암(金岩)으로 표기한다. 마을 뒷산의 길머리에 큰 바위가 있었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다가 그쳐서 보니 바위에서 금빛을 발하여 마을 이름도 이렇게 부르게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은 도시화에 따라 거의 사라지고 마을 명칭만이 2003년 개교한 검바위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시흥시 은행동 250-1 일대이며 마을 명칭 유래가 된 바위는 검바위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있다.

은행정(銀杏亭)은 마을 앞산 기슭에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었던 큰 은행나무가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시흥시 은행동 29-2 일대로, 시흥 은계 보금자리 주택 지구로 개발되면서 자연 마을은 사라졌지만, 그곳에 있는 은행동이라는 동 명칭을 비롯하여 시흥은행초등학교, 시흥은행중학교, 은행고등학교의 학교 명칭만이 마을의 흔적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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