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의 발자취로 따라가는 시흥의 3.1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11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3월 1일 -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 경기도 시흥시 군자로 539[거모동 1582-1]지도보기
비석거리 3.1운동 기념비 - 경기도 안산시 수암길 17[수암동 498]

[개설]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는 민족 광복 운동사에 중요한 사건인 3.1운동이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수암면군자면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맞서 지역민을 조직하여 하부 통치 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 운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수암면의 유익수, 윤병소,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과 군자면강은식, 김천복, 권희, 장수산 등의 마을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형을 받았으며 정부는 이들의 공을 기려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서하였다.

[수암면 3.1운동과 주역들]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군·읍·면 소재지와 리·동 등지로 퍼졌다. 경기도에서는 3월 3일 개성에서 가장 먼저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전국적인 추세와 같이 3월 초에서 4월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3월 말에서 4월 초가 절정이었다. 특히 시흥군에서는 23회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7일 영등포에서 보통학교 학생이 만세 시위 후 동맹 휴학을 결의한 이래 4월 말까지 연인원 1만여 명이 참여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수암면에서도 비립동(碑立洞)[비석거리] 만세 운동이 비밀리에 모의되었다. 와리의 홍순칠(洪淳七), 능곡리의 윤병소(尹秉昭)는 비립동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화정리 주민들은 “집합하지 않으면 방화한다.”라는 격문을 암암리에 전달받고 있었다. 홍순칠은 국유지 소작인 수 명에게 격문의 내용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되니, 이참에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라고 하고 대형 태극기 2기와 작은 기를 준비하였다.

3월 30일 전날 조선 독립 운동을 개시한다는 비밀 통문이 돌았으며 이를 전해 들은 수암면의 19개 동·리 주민들이 각각의 지휘자의 인솔 또는 자발적으로 비립동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가 안 된 시각, 수암리 남쪽 밭[비립동]에 1,300여 명이 모였다. 홍순칠이 허치선(許致善) 집에서 소작인 30인을 인솔하여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가지고 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오전 10시경 홍순칠은 전날 동참하기로 한 소작인들이 금일 모였는지 인원 파악을 하였는데, 후일 불참자를 문책할 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 시각 월피리의 유익수(柳益秀)는 “이 군중 속에는 난폭한 자도 있으니 만일 주재소 등에 폭행을 가하면 곤란하니 당신이 좀 조정해 달라.”는 성포리 구장(區長)의 부탁을 받고 주민 30명을 인솔하여 도살장에 도착하였다. 성포리 구장은 홍순칠이 만든 태극기를 유익수에게 건넸다.

산현리의 윤동욱(尹東旭)은 화정리에 갔다가 능곡리 주민에게 비립동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도착하였다. 화정리 구장 김병권(金秉權)도 주민 30여 명을 뒤따라 도착하였다. 이 사이 주민은 2천 여 명으로 불어 있었다. 이때 순사가 와서 “해산하라. 그러지 않고 읍내로 갈 때는 발포할지도 모른다.”고 협박하자 주민들이 동요하였다. 그때 유익수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읍내 쪽으로 가니 군중들이 뒤따랐다. 유익수는 홍순칠이 읍내에 가서 만세를 부르라고 선동하고 군중들이 읍내로 가려고 초조해하였으므로 자신이 부득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을 지휘하여 읍내로 나갔다. 화정리 구장 김병권도 동네 사람들이 폭행 등을 하지 않도록 감독하며 뒤따랐다.

윤동욱이 선두에 나서 주재소, 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흥분한 군중들이 수암주재소[지금의 안산시 수암동 478-1]와 수암면사무소[지금의 안산읍성 및 관아지]를 습격하려 하자 윤동욱은 “여러분, 우리가 독립되면 관공서는 우리 국유 재산이니 털끝만큼도 상하게 마라.”고 하며 무마시켰다. 그리고 보통학교 앞에서 순사(巡査) 임건호(任健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공자묘[향교]에 이르러 순사들이 줄기차게 해산을 종용하고 사격 자세로 대열을 위협하는 가운데 윤병소의 지도 아래 모두 자진 해산하였다.

오후 10시경 이봉문은 수암리 음식점에서 2~3명과 함께 술을 마시며 수암리 구장이 이날 만세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 화제가 되자 그것이 못마땅하여 이들과 함께 구장 집에 몰려갔는데 구장은 이미 피하고 없었다. 일제는 4월 5일 주동자 일제 검거를 실시하여 유익수, 윤병소,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 등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경성지방법원에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회부되어 5월 27일 1심 판결에서 판사 카가미[鏡一以]가 이들 모두에게 각각 징역 6월에서 1년 6월의 형을 선고하였다. 이후 상고하여 경성복심법원 형사 제4부 판사 이토 준키치[伊東淳吉]는 원판결(原判決)을 취소하고 옥중에서 순국한 윤병소 외에 감형하여 홍순칠 징역 6월, 유익수 징역 1년, 윤동욱 태형 90대, 김병권 태형 90대, 이봉문 징역 6월을 각각 받았다.

[군자면 3.1운동과 주역들]

군자면에서는 3월 29일 장곡리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31일 선부리에서도 다수의 주민이 모여 군자면사무소[지금의 군자초등학교 후문 부근]와 주재소[지금의 시흥경찰서 군자파출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3일 “거모경찰관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洞里)에 배포되었으며, 이 첩지를 하루 전 입수한 일본 경찰이 영등포로부터 순사 6명, 헌병 7명을 무장시켜 파견하였다. 4월 4일 오전 11시경 주재소 부근에 약 천여 명이 모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원곡리의 강은식(姜殷植)은 군중 속에서 구한국(舊韓國) 국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선동하여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죽율리에서는 김천복(金千福)이 죽율리 주민들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기 위해 면사무소로 가라. 만약 불응하는 때에는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마을주민 30명을 구장 집에 모이게 한 다음, 함께 거모리로 출발하였다. 이때 시위 군중이 일본 경찰의 총소리를 듣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천복은 다른 주동자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집결한 수백 명의 군중과 합세, 선동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달려들자 일본 경찰이 총을 쏘아 이들을 해산하였다.

장현리 서당 생도(生徒) 권희(權憘)의 집에서 장곡리 장수산(張壽山), 이종영(李鍾榮), 이종진(李鍾振), 이종형(李鍾亨), 이응수(李應洙)가 모였다. 권희가 서울에서 내려온 선비가 전해준 서울의 만세 운동 이야기를 하였다. 이때 장수산이 “우리 백성이 남의 나라에 당하고만 살 수 없다. 우리도 무엇인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적극 찬동이다. 우리도 힘을 합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자.”고 거사를 모의하였다. 4월 6일 권희는 집에서 밤새 ‘비밀통고(秘密通告)’라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였다. 내용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내일 7일 이 마을 구시장[지금의 서안산 나들목 부근]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려고 한다. 각 주민은 구한국 국기 1기를 휴대하여 모이라.”였다.

거사 장소인 구시장은 구장터로 안산의 대표적인 장시였던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이다. 1896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정부의 친일적 행태에 항거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던 곳이다. 작성된 비밀통고문은 장수산과 먼저 검토하였다. 격문은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하도록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장수산이 마을 구장의 조카 이종영의 집 앞에 놓아두고 주민들이 서로 돌려보게 하여 참여를 독려하였다.

권희장수산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종진은 4월 5일 오후 3시경 밭에서 돌아오는 도중 군자리에 가까운 장곡리 남쪽 고개 길가에서 1통의 문서[격문]와 봉투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해 이종형에게 읽어 달라고 했는데, “4월 7일 만세를 부르니 면사무소에 집합하라.”는 사발통문이었다. 이종진은 이것을 장곡리 구장 이덕증에게 전달하였다. 이덕증도 4월 5일 오후 6시경 이응수로부터 이종형이 “구장에게 교부하라.”고 하였다며 비밀통고문 1통을 받았는데, “오는 7일 대한 독립 만세를 높이 부를 터이니 구시장 자리에 면민은 집합하라. 오지 않는 자는 후일 위해가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덕증은 사환을 시켜 이 격문을 다시 이웃 월곶리 구장 앞으로 보냈다. 4월 6일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권희, 장수산, 이종진 등은 웃터골 장밭머리를 돌아나오다 순사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다음날 수원경찰서로 이송되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강은식김천복은 체포, 기소되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 판사 아리사와 사쿠치[有澤作治]에 의해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년에 처해졌다. 이후 항소하여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 판사 제4부 이토 준키치[伊東淳吉]가 기각하고, 재차 상고하여 7월 31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이시카와 마사시[石川正]가 이를 기각하였다. 구장터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 붙잡힌 권희, 장수산은 「보안법」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 판사 가나카와 히로키치[金川廣吉]에 의해 각각 징역 1년과 10월에 처해졌다. 이에 항소하여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 형사 제4부 판사 이토 준키치[伊東淳吉]가 기각하였다. 재차 항소하자 9월 15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와다나베 도루[渡邊暢]가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시흥 지역 3.1운동의 특징과 수훈]

시흥 지역의 3.1운동은 서울과 인접하여 3월 1일의 시위 소식을 듣고 있었고, 또한 학교를 통학하면서 3월 1일 서울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이 많아 이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당시 시흥 지역에는 별도의 시위 주도 조직이 결성되거나 기독교나 천도교 계통의 종단 조직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지만, 구장을 중심으로 리 단위의 전통적인 마을 단위의 주민들이 통문과 격문을 돌리는 등의 사전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단발로 끝났으며 모의와 진행 과정에서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등 투쟁적인 성향이 나타났지만 실행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시흥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연속해서 주도했던 인물은 3월 31일 수암면과 수원군 반월면[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반월동 일대]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던 유익수뿐이다. 만세 운동이 일어나면 이웃한 지역 주민들이 자극을 받아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군중을 조직했는데, 이는 주민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시위 계획을 알릴 수 있을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만기 출소 후 일제로부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늘 감시와 행동의 규제를 받았다.

시흥시에서는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2015년 3월 1일 군자초등학교에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윤병소·유익수·권희·장수산, 2008년 김천복, 2011년 강은식에게 각각 추서하였다. 그리고 대통령표창을 1992년 홍순칠, 1996년 윤동욱, 2006년 김병권에게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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