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06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육지가 된 섬]

오이도는 시흥시의 서남쪽 끝에 있는 섬이다. 각종 어패류가 많이 산출되는 관광지이자 신석기시대 이래 선사 유적이 여러 차례 발굴되어 시흥 오이도 유적은 사적 제441호로 지정되었다. 오이도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서쪽 지역으로 육지에서 10리[4㎞] 정도 떨어진 섬이었다. 그러나 1922년 일제가 염전 지대를 조성하면서 안산시와 이곳 사이로 제방이 놓이면서 육지화하였다. 과거 안말, 가운데살막, 신포동, 고주리, 돌주리, 배다리, 소래벌, 칠호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지만, 지금은 도시화로 모두 사라졌다. 원주민들은 섬 지역 일부를 매립해 조성된 오이도 이주민단지로 이전하여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오이도 일대의 염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지 경제 수탈을 위해 1921년부터 1925년 사이에 군자염전을 건설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 대규모 천일 염전이 만들어진 이후로 지역 사람들의 생활 환경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오이도라 불리기까지]

오이도로 추정되는 섬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세종실록』이다. 1448년(세종 30) 8월 27일 안산군에 속한 섬으로서 오질이도(吾叱耳島)가 나오고, 『지리지』 안산군조(安山郡條)에는 봉화가 있는 곳으로 오질애(吾叱哀)가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안산군조에도 ‘오질이도봉수’가 나오고 있어 ‘오질이-오질애-오이도’로 지명이 변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이도가 까마귀의 귀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는 일설은 고유어 오질이를 한자식으로 간략히 적기 위해 오이(烏耳)라는 말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1871년 편찬된 『경기읍지』와 1894년 편찬된 『기전읍지』에는 오이도로 나와 있다.

오이도의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옛날 제밀[제물포]에서 어느 임금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하다가 오이도 서쪽에 있는 팔미도 앞바다에서 조난하여 이 섬에 표류하였다. 임금이 목이 말라 물을 찾았더니, 어느 어부가 물을 떠왔는데 그 그릇이 옥(玉)으로 만든 그릇이었다. 이에 임금이 놀라 귀가 번뜩 틔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섬은 오귀도(烏貴島) 또는 오끼섬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옆에 있는 쪽박섬은 원래 오이도와 뿌리가 연결되었던 것을 일인들이 잘라버렸다. 이때 잘라진 곳에서 피가 흘러나와 일인들이 모두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이도옥구도는 산봉우리가 중국 쪽을 향한다고 하여 역적섬이라고도 부른다. 옥구도 돌주리 관사 뒤 신사단 터 밑에 있는 우물을 생금우물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의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물맛이 좋아 일본인들이 우물에 뚜껑을 만들어 덮고 자물통으로 잠그기까지 하였다. 조선 말엽에 안산군 마유면 죽율리[지금의 시흥시 죽율동]에 사는 김 모씨가 이곳 산에서 나무를 하러 왔다가 갈증이 나서 우물물을 마시려는데 우물 속에 닭 두 마리가 있어 그중 한 마리를 잡아 집에 가져와서 놓고 보니 생금으로 변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우물을 ‘생금우물[生金井]’로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금계정(金鷄井)이라고도 부른다.

[동아시아 선사 문화 연구의 단서, 오이도 조개무지]

오이도는 섬 전체가 조개무지로 이루어졌을 정도로 조개무지가 산재해 있다. 남부, 남서부, 북부 지역 조개무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남부 지역인 신포동 조개무지 등지에는 불을 땐 흔적이 있는 야외 화덕자리[노지(爐址)] 3기를 비롯해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 및 석기, 골각기(骨角器)가 나왔다. 남서부 지역인 가운데살막 조개무지에는 빗살무늬토기 조각, 석기류 등 1천여 점과 구덩식[수혈(竪穴)] 주거지 3기, 야외 화덕자리 3기가 나왔다. 구덩식 주거지는 원시 시대 살림집 형태의 하나로 30~100㎝의 깊이로 넓은 구덩이를 파고 위쪽에 지붕을 덮은 것이다. 북부 지역에는 안말, 뒷살막, 소래벌 조개무지가 있는데, 뒷살막에서는 적은 양의 빗살무늬토기 및 석기가 나왔다.

시흥 오이도 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에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였다. 토기에 쓰인 바탕흙과 문양은 한강 유역의 중부 내륙 지방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문화적으로 관련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중국 산둥[山東] 지방 신석기 문화인 룽산[龍山] 문화의 검은 간 토기[흑도(黑陶)]와 제작 방식이 유사한 토기도 1점 출토되었다. 오이도의 조개무지는 동아시아 선사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어선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 오이도 당제]

오이도의 당제는 마을의 무사태평, 어선의 안전과 풍어(豐漁)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냈다. 당제는 격년으로 음력 2월 중에 새싹이 나고 개구리가 나오기 전에 좋은 날을 잡았다. 당제를 지낼 때면 주민들은 형편 되는 대로 갹출하여 제물로 소를 잡아 우물고사와 군웅고사 및 당고사에는 몸통을 올리고, 공터에서 굿을 할 때는 머리와 다리를 썼다. 술을 담그고 떡을 찌고 다양한 제물을 올렸다. 술을 100말, 떡을 80시루나 하는 큰 굿이었다고 한다.

제의(祭儀)는 당제 15일 전 당주를 선출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피고사, 우물고사, 군웅고사, 당제, 공터에서 하는 굿 순으로 3일 동안 진행되었다. 제에는 무당과 삼현육각(三絃六角)[피리가 둘, 대금, 해금, 장구, 북이 각각 하나씩 편성되는 풍류]을 갖추고 줄타기하는 사람도 불렀다. 이들은 주로 하중동에 있는 찬우물마을[광대촌]에서 왔다. 당주는 부당주까지 두 사람을 선정하였다. 당주들은 금기를 지켜야 한다. 제의 날짜가 잡히면 당제 때까지 매일 밤 ‘먼우물’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당주는 먼우물에서 조석으로 하루 두 번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려야 한다. 군웅고사 때 당주가 기를 들고 신을 받는데, 그 깃발을 맨 앞으로 해서 무당과 마을 사람들 모두 당으로 올라간다.

당제가 끝나고 마을 사람들과 외지에서 구경 온 사람들이 공터에 모이면 무당은 다시 굿판을 벌이고 줄타기하는 사람을 불러 줄타기를 한다. 굿이 끝나면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다. 당은 봉화를 올렸던 자리이기도 한데, 200년 정도 되었다. 신당에는 안씨 부인을 모시는데, 당이 위치한 곳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당을 아래로 옮겼는데 동제는 단절되었다. 근래에는 무당이 와서 치성을 가끔 드린다.

국민 관광지 오이도의 유명한 무형 유산인 당제를 더 이상 전승시키지 않는다면 애석한 일이다. 일본은 마쓰리 축제를 통해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이도에서도 현재 남아 있는 자료와 촌로들의 기억을 토대로 당제를 부활한다면, 강릉단오제처럼 오이도 당제도 시흥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록으로만 볼 수 있는 오이도 봉화 터]

오이도 봉화 터는 오이도 살막 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있었는데, 이곳 봉수를 옷애[吾叱哀]라고 하여 남으로는 남양의 무응고리(無應古里)[지금의 안산시 신길동 일대], 북으로 인천의 성산(城山)[문학산]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여지도서』 1759년(영조 35) 안산군 봉수조에는 오이도에 있던 봉수를 정왕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1899년 5월 안산군에서 발간한 『안산군읍지』 봉수조에 갑오년에 철폐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894년(고종 31) 정왕산 봉수를 폐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왕산은 시화지구 개발 사업으로 산의 절반이 헐려 봉수 터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신선함과 풍성함을 담은 먹을거리]

오이도에서는 굴밥, 회, 조개구이, 고등어, 간장게장 등 맛있는 해산물로 차려진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오이도 굴회덮밥이 유명한데, 자연산 까막굴이 많이 나는 시흥의 서쪽 해안 지역 일대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향토음식이다. 그러나 현재는 어업의 쇠퇴와 굴 생산의 감소로 조선 전기부터 이 마을에서 누대를 걸쳐 이어온 박길웅 댁을 통해 전수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박길웅의 부친이 섬 전체의 구장(區長)을 하였는데, 집에 손님이 많이 오고 해서 이 음식을 접대용으로 8월에서 3월 사이에 많이 장만하였다. 4월부터 7월까지는 굴의 산란기라 먹을 수 없다. 지금은 박길웅의 부인 송광자가 전수하고 있다.

전통적인 재료 및 조리법은 오이도에서 채취되는 자연산 굴을 소금물에 2~3회 씻고 맑은 물에 헹궈 낸 다음 물기를 뺀다. 그다음 쌀과 함께 섞은 후 밥을 고들고들하게 지어 진간장에 다진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등으로 양념장을 만들어 비벼 먹는다.

오늘날 송광자의 조리법은 쌀은 밥 짓기 30분 전에 미리 씻어서 물기를 빼놓고, 굴은 소금물에 흔들어 씻어 껍질과 불순물을 골라내고 건져서 물기를 뺀다. 씻어놓은 쌀과 굴을 켜켜로 안치고 불에 올려 끓어오르면 불을 낮추어 뜸을 푹 들인다. 도라지는 센 줄기를 골라내어 헹군 후 5㎝ 길이로 썰어놓는다. 시금치는 다듬어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데쳐서 찬물에 헹군 후 건져 꼭 짜서 잘게 썬다. 숙주도 끓는 물에 데치고, 표고버섯은 물에 불려 줄기를 뗀 후 채 썬다. 파, 마늘은 다져 깨소금, 참기름, 진간장과 섞어 양념장을 만든 후 시금치와 숙주를 넣어 무친다. 도라지, 고사리, 표고버섯은 양념하여 볶는다. 오이는 채 썰어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 물기를 거둔다. 상추는 흐르는 물에 씻어 1㎝ 폭으로 썰고 깻잎은 돌돌 말아 채 썬다. 달걀은 알고명[지단]을 부친 후 채 썬다. 고추장과 식초, 설탕, 물을 섞어 초고추장을 만든다. 끝으로 굴밥을 그릇에 담고 넓은 그릇에 재료들을 고루 돌려 담은 후 참기름을 넣고 준비된 초고추장을 곁들여 낸다.

[국민 관광지가 된 오이도]

지하철 4호선 종착역인 오이도역에서 5㎞ 떨어진 오이도는 갯벌 조개 캐기 체험, 오이도 빨강등대, 직접 잡아서 판매하는 오이도선착장 입구 자판 횟집,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송도 국제 도시 조망, 오이도 저녁놀, 인천해양경찰서 퇴역 경비함을 활용한 함상전망대 등 맛집과 볼거리, 문화유산이 있는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오이도 빨강등대는 어업은 물론 갯벌 체험이나 어선, 해안 경관 감상을 통해 관광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2005년에 세워진 해양 관광 시설이다. 오이도 해안 길은 먹자 골목, 생명의 나무, 빨강등대, 오이도종합어시장, 오이도선착장, 노을의 노래전망대, 함상전망대, 아트 컨테이너 등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무인 자전거 대여소를 이용해 자전거를 통해서도 오이도를 만끽할 수 있다. 어민들이 운영하는 어시장에는 늘 싱싱한 해산물로 가득하며 활기가 넘친다. 선착장 입구 방파제 위에 있는 천막이 즐비한 자판 횟집에는 해삼, 오징어, 멍게 등 각종 해산물이 풍성하다.

[오이도의 내일을 위해]

국민 관광지로 주말이면 늘 인파로 붐비는 오이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바닷바람을 쐬고 먹자 골목에서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맛집 찾기는 중요한 여행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도의 경우 다른 문화적 자원도 풍부한데,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바닷가를 서성거리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볼거리를 충분히 개발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옥구도 생금우물, 오이도 당집, 봉수대 터, 조개더미, 염전 등 주변의 활용 가능한 문화 자원을 중심으로 답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오이도의 당제를 부활시켜서 동해안의 강릉단오제에 버금가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바다 축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일본의 축제인 마쓰리로 향하는 외국인의 시선을 오이도로 모일 수 있도록 역사 문화유산과 지역의 생활문화를 충분히 개발하여 문화 자원화해야 한다. 먹을거리 중심의 식당가를 넘어서 역사와 문화, 축제를 만끽할 수 있는 오이도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

시흥시에는 지역 문화가 넘쳐난다. 마을마다 소중한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그러나 오늘날 시흥 군자봉 성황제 외에 대부분 문화가 사장되거나 방치되고 있다. 지역 문화 자원의 보고인 시흥시를 새롭게 인식하고 기록·보존하고 활용해야 한다. 오이도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이도의 지역 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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