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566
한자 具然濬
영어공식명칭 Koo Younjo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6년연표보기 - 구연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구연준 소래공립보통학교 훈도 역임, 방산리 서당 운영
몰년 시기/일시 1945년 1월 6일연표보기 - 구연준 사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 구연준 강화군 3.1운동 주도
출생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473
거주|이주지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지도보기
묘소 인천광역시 서구 드림로 546[당하동 산149]
성격 독립운동가|교육자
성별

[정의]

경기도 시흥시 소래 지역에서 활동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개설]

구연준(具然濬)[1886~1945]은 1919년 3.1운동 당시 강화도에서 동지들과 『자유민보(自由民報)』와 독립선언문 등을 비밀리 인쇄하고 배포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이후 1920년에 부천군 소래면 신천리[지금의 시흥시 신천동]으로 이주하여 소래공립보통학교의 훈도를 역임하고 부천군 소래면 방산리[지금의 시흥시 방산동]에서 서당을 운영하였다.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아버지 구항조(具恒祖)와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2남으로 태어났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고 손자로는 구경회(具慶會)[전 경기도의원], 구진회(具振會)[전 소래농협장], 구용회 등이 있다.

[활동 사항]

구연준은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473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의 배재학당을 수료한 후, 배재학당 동문인 구자옥(具滋玉)[초대 경기도지사] 등과 대한기독청년회[YMCA]에서 활동하다가 강화로 귀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한 달여에 걸쳐 강화 전 지역으로 만세 운동이 전파되었다. 강화에서의 본격적인 만세시위 운동 계획은 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劉鳳鎭), 황도문(黃道文), 황유부(黃有富), 염성오(廉成五), 장윤백(張允伯) 등이 모두 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이들의 주도 아래 읍내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3월 11일에는 황유부의 집에서 황도문·염성오 등이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國民會報)』 등의 문건을 수백 매씩 인쇄하고, 황도문은 18일의 거사를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강화인민에게」라는 전단과 「독립가」를 만들었다. 3월 18일 강화 장터에 모인 군중 사이에는 만세시위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오후 2시가 되자 유희철(劉熙哲), 황일남, 황윤실 등의 결사대원들이 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시위대는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이날 시장에 모인 군중은 1만 명에 육박하였으며, 그 가운데 군청 앞 시위에 가담한 인원이 5,000~6,000명이었다.

시위 군중들은 밤 8시 30분 경찰서 앞에서 일시 해산하였다가 재차 시장에 모여 늦은 밤까지 만세를 고창(高唱)한 뒤 자진 해산하였다.18일 읍내에서의 대규모 시위 소식을 접한 일제는 인천수비대 경찰 10여 명과 서울 용산 주둔군 4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였다. 현지에 도착한 일제 군경은 19일 오전 9시부터 각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며 시위 참가자 63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길상면 온수리 천도교구에서 과잉 탄압에 항의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매일신보』 기자 조구원(趙龜元) 등에 대한 시위 탄압의 부당함을 경고하였다.

이때 합일학교(合一學校) 교사 구연준을 비롯해 김한영(金翰永), 김영희(金永禧), 조봉암(曺奉岩) 등은 비밀리에 모여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불길이 꺼졌다. 우리가 불쏘시개가 되어 만세시위의 불길을 일으키자.”라고 결의한 뒤 3월 20일경 『자유민보』 등 십수 종의 문건을 만들어 강화 주민에게 살포하였다. 이처럼 구연준 등은 『자유민보』 외 10여 종의 독립운동 문서를 작성하여 강화읍 내에 배포하였으며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밀고로 강화경찰서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당시 강화군수의 주선으로 1920년 소래공립보통학교[지금의 소래초등학교] 초대 훈도로 6년간 근무하다가 교육칙어 은닉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하였다. 이후 부천군 소래면 방산리 김근환 댁에서 서당을 운영하면서 영농에 종사하였다. 1945년 1월 6일 사망하였다.

[묘소]

인천광역시 서구 당하동 산149[매장 당시 주소는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 산179]에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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