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506
한자 學辨
영어공식명칭 Hakby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691년연표보기 - 정제두 『학변』저술
편찬 시기/일시 1856년 - 정문승 정제두의 문집 『하곡집』 22책본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72년 - 한국고전번역원 정제두의 문집 『하곡집』 번역본 간행
소장처 『하곡집』 22책본 - 국립중앙도서관
성격 논변서
저자 정제두
편자 정문승
간행자 한국고전번역원
권책 『하곡집』 22책본 중 정집 권8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에 거주하던 정제두가 저술한 『하곡집』 22책본 중 정집 권8에 해당하는 양명학 논변서.

[개설]

『학변(學辨)』은 경기도 안산군 잉화면 화정리[지금의 시흥시 화정동]에 거주하던 정제두(鄭齊斗)[1646~1736]가 저술한 『하곡집(荷谷集)』 22책본 중 정집(正集)에 속하며 정주학(程朱學)의 지리하고 번잡한 학문 태도를 비판한 양명학 논변(論辯)이다. 『하곡집』 22책본은 제1책에서 제9책까지는 정집(正集), 제10책과 제11책은 부집(附集), 제12책에서 제19책까지는 내집(內集), 제20책부터 제22책까지는 외집(外集)이라 하여 내용에 따라 4개로 구분하여 놓았다.

정제두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실패한 뒤 24살이 되던 1672년(현종 13)부터는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과의 친교를 통하여 심학(心學)을 접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양명학 비판서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저술한 이후 이학(異學)으로 배척받는 양명학에 심취하여 34살 삶을 정리하면서 자신이 양명학자임을 천명하하였다. 40세에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부임한 후에도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의 정국 불안에 사임하고, 안산군 잉화면 화정리 가래울마을로 입향하여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때 스승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명재(明齋) 윤증(尹拯) 외에 성재(誠齊) 민이승(閔以升), 박심(朴鐔)과의 치열한 서신 논변을 전개하였는데 그 산물이 『학변』이다.

양명학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으로 취급받던 시절에 서신과 『학변』을 지어 양명학 변론서를 내놓은 행위를 기점으로 정제두를 한국 양명학의 대종사라 일컫는다.

[저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추곡(楸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右議政) 정유성(鄭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進士)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戶曹判書)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편찬/간행 경위]

『학변』정제두가 43세 전후인 1691년(숙종 17) 전후에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기사환국을 치르고 남인(南人) 정권하에서 서인계(西人系)가 수세에 몰리던 시기로, 정제두는 경기도 파주군에 퇴거한 박세채에게 문학(聞學)하다가 양명학 신봉을 표면화한 무렵이다. 박세채는 정제두의 이학 신봉을 충고하여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저술하였는데, 윤증도 글을 보내어 정제두의 양명학 공부를 질책하던 때였다. 최석정도 정제두에게 「변학(辨學)」을 지어 보내면서, 정제두가 저술한 왕양명 초록을 보고 싶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에 『학변』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구성/내용]

『학변』은 전문에 걸쳐서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이 전한 도학(道學)을 정주학에 바탕하고 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知行合一)에 준하여 정제두의 심성학을 밝힌 글이다. 정제두는 『맹자(孟子)』의 고자편(告子篇), 공손추(公孫丑)에서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인의(仁義)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내재함을 주장하였다. 물(物)과 이(理)를 구분하고 안과 밖이 둘이며, 외물(外物)에서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하면서 무자기(毋自欺)가 곧 치지(致知)며 지(知)가 밝혀져 성실(誠實)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서(虞書)』의 정일(精一)과 『논어(論語)』의 박문약례(博文約禮)와 하학상달(下學上達), 『중용(中庸)』의 명선성신(明善誠身), 택선고집(擇善固執), 존덕성이도문학(尊德性而道問學), 맹자의 진심지성(眞心知性)과 존심양성(存心養性) 등 성학(聖學)의 주장이 오직 마음의 천리(天理)에 있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양명학이 전래될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주체적 판단을 중시하는 양명학보다는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규범을 중시하는 정주학이 필요한 시기였으며, ‘정주(程朱)의 전통이 무너질까 염려’한 퇴계 이황의 양명학 변척(卞斥) 또한 당시 학계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퇴계의 양명학 변척 이후 조선의 유학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하여 성리학에서 양명학을 따르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정제두는 34세에 지은 『임술유교(壬戌遺敎)』를 통해 자신의 학문이 양명학에 있음을 천명한 이후, 41세 이후부터는 가래울마을에서 스승 및 지인과의 서신 논변을 통하여 심학으로서의 양명학을 주장하였다. 그 주장이 『학변』에 실려 있다.

『학변』에서 주장한 이데올로기에 머물지 않고 사회 발전을 위하여 개혁적 사고를 지속하는 학자의 용감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사회는 이렇게 양명학의 당위성을 수용하면서 서학(西學)을 받아들이고 실학이 대두하면서 새로운 변화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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