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84
한자 河友明孝子旌閣
영어공식명칭 Monument Shrine to the Filial Piety of Ha Umy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기도 시흥시 소산서원길 1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방문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5월 31일연표보기 - 하우명 효자정각 시흥시 향토유적 제11호 지정
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소산서원길 11[신천동 422]지도보기
성격 정려
관리자 시흥시
문화재 지정 번호 향토유적 제11호

[정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하우명을 기리기 위해 집 앞에 세운 붉은 문.

[개설]

정려(旌閭)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알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는 ‘정문(旌門)’, ‘정표(旌表)’라고도 한다. 정려는 건물의 여부나 대상에 따라 세분된다. 건물 없이 문을 세우면 정려문이고, 건물을 세우면 정려각이라고 한다. 대상이 여자면 정절을 중요시해 열녀문·열녀각을 세우고, 남자로 효를 드높이면 효자각이 된다. 정려각은 정려를 받은 주인공의 이름과 고향, 행한 일을 기록한 현판이나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된다.

조선은 유교적 덕목 가운데 효와 충을 장려하기 위해 수시로 지방의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 대한 실상을 보고하고 상을 주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해 두었다. 수령과 지방의 유력자들이 예조(禮曹)에 신청하면 심사하여 왕에게 올리고 승인해 주었다. 조선시대 정려를 받은 이력은 당사자와 그 집안뿐 아니라 해당 마을의 경사였다. 국가에서는 기념비를 세워 주고 세금을 면제하거나 벼슬을 주어 대상과 주변에 큰 혜택을 내렸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 지역이었던 인천부에서 하우명(河友明)[1413~1493]의 효행을 중앙에 보고함으로써 국가에서 정려를 세워 주었다. 하우명은 조선 4대 왕 세종 대에 당상관(堂上官)을 지낸 하연(河演)의 아들로 고려 말 진주 지역의 토성 세력에서 중앙 개경의 관료 가문으로 진출하고 있던 시기를 살았다. 하연의 집안은 효행과 관련된 행적이 드러난다. 하연이 부친 하자종(河自宗)을, 하우명하연을 효로써 대한 것이 사례로 손꼽힌다. 조선시대에 하연을 비롯한 하우명의 가계가 중앙에 오르내린 이유는 관계에 나아간 경력도 배경이었으나 무엇보다 조선시대 통치 윤리인 효를 가정에서 이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인물의 생애]

하우명은 조선 전기의 인물로 태종과 성종 연간의 문신이며, 호는 연당(蓮塘),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하연의 3남으로 태어났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철원부사(鐵原府使)를 거쳐, 41세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院使)에 이르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인천부 신현면[지금의 시흥시 신천동]에 은거하였다. 이후 세조가 두 번 도진무절제사(都鎭撫節制使)에 등용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473년(성종 4)에 지방관이 그의 효행을 상신하자 나라에서 정각을 세우고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 이 정각이 하우명 효자정각으로 시흥시 향토유적 제11호이다.

[위치]

하우명 효자정각경기도 시흥시 소산서원길 11에 있다.

[변천]

하우명의 효행을 기리며 정문을 세우고 상을 주자는 예조의 건의가 『성종실록(成宗實錄)』 1473년(성종 4)에 기록되어 있다. “인천(仁川)에 사는 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하우명은 어려서부터 양친을 봉양함에 있어서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친히 스스로 집찬(執饌)하며 정성을 다하였고, 어버이가 돌아가자 여묘(廬墓)살이 3년을 하면서 직접 땔감을 져다가 밥을 지었고, 복(服)을 마치자 묘 곁에 영당(影堂)을 만들고, 삭망(朔望)에 전(奠)드리기를 폐하지 않았으며, 무릇 계절의 물건이면 반드시 올렸으니, 그 효성이 순박하고 지극합니다. 청건대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정문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여 권장(勸奬)하소서.”

여기서 대전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말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유교적 윤리인 효를 권장하기 위해 기념물과 금전적인 보상을 주도록 법제화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정려비(旌閭碑)가 먼저 세워지고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정각은 17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맞배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은 목조 건물로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고 방풍판(防風板)이 달려 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훼손이 심하여 1988년에 국비 388만 3000원을 들여 전면 보수하였고 1997년 보호 담장을 설치하였다. 정려비의 규모는 높이 1.27m, 폭 61㎝, 두께 22㎝이다. 비문은 부사(府使) 최흔(崔昕)이 지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에는 군신·부자·부부 관계의 삼강(三綱)을 유교 윤리의 근본으로 간주하고 백성을 교화하여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삼강의 탁월한 행적이 있는 자를 엄격히 선발하여 포상하였다. 조선 전기에 『경국대전』으로 법제화하여 도의 관찰사(觀察使)나 암행어사(暗行御史), 지방 유림 등의 천거를 받아 예조에서 국왕에게 제가(制可)를 받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포상은 극소수의 충신, 효자, 열녀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었다. 이에 관련된 행적을 엄선해서 정려, 음직(蔭職), 증직(贈職), 복호(復戶), 면천(免賤)의 순서로 등급을 나누었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선 후기 사회와 경제적 혼란 와중에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는 추세가 나타났다. 후손들은 그 조상이 이미 포상을 받았지만 정려로 품격을 높이려 하였고, 증직(贈職)까지 추가로 받으려고 하였다. 관료 기강이 해이해진 헌종 대 이후에는 정려가 남발되고 심지어 금전으로 사고파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지경에서 조선 전기에 정려에 오른 시흥 지역의 하우명 효자정각은 아직 엄격하게 정려 규정이 지켜지고 있을 때 받아 당시의 기준을 확인할 수 있는 증빙이자 연구 자료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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