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81
한자 始興芳山洞靑磁-白磁窯址
영어공식명칭 Bangsan-dong Celadon and Porcelain Kiln Site
이칭/별칭 시흥 방산동 청자와 도기 요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방문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9년 6월 11일연표보기 -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요지 사적 제413호 지정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370-1번지지도보기
성격 가마터
관리자 시흥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413호

[정의]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에서 발굴 조사된 청자와 백자를 굽던 가마터.

[개설]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는 1990년대 초반경 학계에 알려진 이래 정식으로 발굴 조사가 된 생산 유적이다. 시흥 지역에서 가마터가 발견된 곳은 계수동, 광석동, 도창동, 무지내동, 물왕동, 미산동, 방산동, 장현동, 포동 등이다. 이 중 와요지(瓦窯址)가 2곳, 옹기 요지(窯址) 1곳, 청자 요지가 3곳이며, 16곳의 유물 산포지 중 청자 가마임이 확실한 곳이 10곳이 넘는다. 시흥 지역에 산재된 가마는 고려시대의 청자 혹은 도기 요지가 대부분이며 대체로 요업의 중심 시기는 고려 초에 집중되어 있다.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도 발굴 결과 고려시대 한반도 중부 지역 전축요(塼築窯)의 구조와 초기 청자 생산 양상 및 연대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는 사적 제413호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시흥의 서부 지역은 해안이 닿아 고려시대 청자의 주요 소비처인 개성으로 물자를 나르기 용이하였다. 시흥시 방산동을 위시한 생산 지역들은 청자 운송의 유리한 입지 조건으로 고려 초부터 운영된 것으로 보이며 그 흔적이 해당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위치]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산39-1과 전370-1에 걸쳐 있다. 이곳의 지형은 방산동에서 포동 방향으로 표고가 낮아지는 언덕이 있는데, 가마는 서북 사면에서 발견되었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지표를 굴착하면 뻘흙이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시흥의 가마터는 1990년대 이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시흥시 방산동 요지 부근에 노출된 갑발(匣鉢)[도자기를 구울 때 담는 큰 그릇] 폐기물더미를 마을 사람들이 '뚝배기, 투가리 만들던 곳'으로 알고 있었다. 1991년 1월, 대야초등학교 교사 김재원과 마을 통장 안병권이 시흥시청 문화공보실에 신고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이로써 같은 해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초 조사를 실시하고 유적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이후 해강도자미술관에서 1997년, 1998년, 2002년 청자 요지와 백자 요지를 발굴 조사하면서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방산동 산39-1번지와 전370-1번지에 걸쳐 있으며 청자 가마 1기, 백자 가마 1기가 발견되었다.

해강도자미술관은 1997년,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방산동 청자 요지 발굴을 진행하였다. 가마는 벽돌을 쌓아 축조한 전축요로 총 길이는 39.1m이다. 가마 내벽 너비는 넓은 곳이 평균 220㎝에서 차츰 줄어 좁은 곳은 90㎝이다. 바닥면의 경사는 번조실(燔造室)[도자기를 굽는 방]이 약 15도, 굴뚝부가 10도이다. 아궁이는 길이가 약 300㎝, 폭이 약 130㎝로 가마 벽과 마찬가지로 벽돌로 축조하였다. 굴뚝부도 벽돌로 정리되어 있는데 각각 모서리 끝 단면 윤곽이 ‘ㄷ’자처럼 90도로 꺾여 있다.

출토 유물은 번조실 내부보다 가마의 좌우 측면 퇴적층에서 주로 수습되었다. 종류는 청자, 백자, 도기가 있으며 가장 많은 것은 갑발 폐기물이다. 기종은 발(鉢), 완(碗), 접시(接匙), 화형 접시(花形楪匙), 잔(盞), 잔탁(盞托), 반구병(盤口甁), 유병(油甁), 주자(注子), 호(壺), 합(盒), 뚜껑, 제기(祭器), 장고(杖鼓), 퇴주기(退酒器) 등이 있으며 청자가 백자에 비해 약 95 대 5의 비율로 많다. 특이한 점은 잔탁, 주자, 화형 접시, 퇴주기, 잔 등 대부분이 차 도구라는 것이다. 또한 찻잔[완]의 밑바닥 모양의 변천 과정에서 선해무리굽[해무리굽보다 먼저 만들어져서 붙여진 이름]에서 한국식 해무리굽[해무리처럼 동그란 형태로 좁고 낮게 깎은 형태의 찻잔]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방산동 청자 요지 운영 시기는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 가마터 유물과 고려 3대 왕 정종의 무덤인 안릉(安陵)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할 수 있다. 요업 개시는 적어도 10세기 2/4분기경, 폐요 시기는 원산리 가마의 하한(下限)과 같은 10세기 말경에서 11세기 초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방산동 백자 요지는 2002년 해강도자미술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백자 요지는 가마를 지하에 조성한 ‘지하식 단실(單室) 등요(登窯)’이다. 전체 규모는 길이 6.9m, 최대 폭 2.9m, 내벽 높이 약 150㎝, 번조실 경사도 약 20도이다. 가마의 구조는 충청북도 진천군 산수리 요지나 충청남도 보령시 진죽리 요지와 유사한데, 가마의 평단면은 크게 유선형을 이루며 아궁이는 좁고 경사면이 가마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 반대로 번조실은 급하게 꺾여서 굴뚝부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다.

출토 유물은 경질(硬質)의 자기 및 도기 조각이 많다. 기종은 동이[반(盤)], 호, 병(甁), 시루 등이 발견되었다. 호가 가장 많았고 광견호(廣肩壺)[어깨가 넓은 항아리], 단경호(短頸壺)[짧은 목 항아리], 소호(小壺), 반구호(盤口壺)[주둥이가 소반처럼 생긴 병], 광구호(廣口壺)[넓은 입 항아리] 등으로 구분된다. 도기 제작 방법은 기종과 무관하게 바닥면을 물레 위에 편평하게 다지고, 그 주변으로 테쌓기로 올리면서 두들기고 물레로 정면(整面)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운영 시기는 비교 유적이 드물어서 확정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청자 가마의 운영 시기보다 약간 빠르거나 근접한 시기인 10세기 전반경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황]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는 1999년 6월 11일 사적 제413호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는 학계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방산동 청자 가마는 우리나라 도자사에서 청자 제작 초기 단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우리나라 청자 제작의 초기 단계는 벽돌로 만든 전축요, 진흙으로 만든 토축요(土築窯)의 두 계통으로 구분된다. 전축요는 경기도·황해도·충청남도 북부를 포함한 중부 지역 일대, 토축요는 전라도 일대의 남부권에 분포하고 있다. 또한 전축요는 중국의 청자나 백자를 모델로 한 생산품이 주류이며, 다량의 청자와 소량의 백자가 동반 제작되고 있다.

토축요는 전라도 일대에서 발견되는 토기에 청자 기종이 접목된 듯한 생산품이 중심이며, 다량의 청자와 소량의 흑유 자기(黑釉瓷器)가 동반 생산된다. 이 두 계통의 발생 연유와 상관관계가 불분명하여 초기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 문제에 대한 가설이 분분한 형편이다. 그러나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유적으로 1980년대 이후 경기도 용인시 서리 가마터와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가마터가 꼽혀 왔다. 여기에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견됨에 따라 관련 연구에 상당한 진척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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