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철 공덕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61
한자 申道澈功德碑
영어공식명칭 Shin Docheol Monument
이칭/별칭 평산신공도철공덕비(平山申公道澈功德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시흥시 금이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방문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금이동 도리재마을 지도보기
성격 공덕비

[정의]

경기도 시흥시 금이동에 있는 평산 신씨 신도철의 공덕을 기리는 비.

[개설]

신도철 공덕비(申道澈功德碑)시흥시 금이동 도리재[桃李峴]마을 입구에 건립되어 있다. 비석의 주인공인 신도철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비석의 현재 위치와 비제(碑題) 그리고 마을의 연원과 연결해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신도철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며 평산 신씨 가계가 금이동에 대를 이어 살아왔다. 신도철은 마을 공동체에 기여하고 봉사하였다.

[건립 경위]

마을 주민의 인터뷰를 모은 기사에 따르면 신도철이 마을에 베푼 공덕이 보인다. 신도철은 자흥원(自興院)이라는 야학을 운영하고, 4개 마을의 40여 명 주민에게 한문·영어·산수 등을 가르쳐 마을의 인재를 육성하였다. 또한 마을복지회관을 건립하고 유아 교육과 청소년 교육을 실시하는 등 마을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꾸준히 해왔다. 이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신도철 공덕비를 세웠다.

[위치]

시흥시 금이동 거멀앞들 남쪽에 도리재라고 불리는 마을의 입구 쪽 언덕 비탈에 신도철 공덕비가 있다. 도리재는 조선시대 인천부 전반면 육리에 있던 자연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 소래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시흥군 소래면에 편입되었다. 도리재는 오씨가 처음 세거한 이래 평산 신씨와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살아왔다.

[형태]

비석의 주인공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고,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신도철 공덕비는 우리나라 비(碑)의 형식 모두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여 우리나라 비의 형식으로 정착된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비를 받치는 대좌(臺座), 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 비신을 덮는 뚜껑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도철 공덕비는 아래에서부터 거북 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받침돌]가 있으며, 등에는 육모의 구갑문(龜匣紋)을 선명히 조각하였고 거북이가 네 발로 땅을 굳건히 딛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비신은 긴 직육면체의 판석을 세웠고 제액(題額)을 새겼다. 비의 윗부분에는 뚜껑돌, 혹은 이수(螭首)를 두어 여의주와 뿔이 없는 이무기를 새겼다.

[금석문]

비석에는 반듯한 해서(楷書)로 비제와 출신이 새겨져 있다. 글씨는 '평산신공도철공덕비(平山申公道澈功德碑)'라고 적혀 있다. 즉, 평산을 본관으로 하는 신씨 집안의 도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위인의 공덕을 기리는 비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공덕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관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현황]

신도철 공덕비는 주변에 접근을 방지하기 위한 구획이 되어 있고 관리가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신도철 공덕비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과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아 일반인이 별도로 찾는 사람이 없다. 관리 유지 책임의 소재는 평산 신씨 종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시흥시에 오랜 역사를 둔 자연 마을에 대를 이어 살아온 성씨와 공동체 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표지이자 자료이다. 또한 역사성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비석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 교육의 보조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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