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징 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46
한자 張善澂墓
영어공식명칭 Tomb of Jang Sunji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창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678년연표보기 - 장선징 묘 조성
조성 시기/일시 1787년연표보기 - 장선징 묘갈 건립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장선징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78년연표보기 - 장선징 사망
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 지도보기
성격 묘소
양식 원형 합장 단분
관련 인물 장선징

[정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장선징 묘.

[개설]

장선징(張善澂)[1614~1678]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정지(淨之), 호는 두곡(杜谷)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장유(張維),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오빠이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인조 때 김화현감, 효종 때 공조정랑(工曹正郞)·배천군수를 역임하였고, 1662년(현종 3) 철원부사로 있을 때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요직인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677년(숙종 3) 한성부판윤으로 재임 중 귀양을 간 송시열(宋時烈)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송시열의 신원을 간청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자 고향에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시호는 정장(正莊)이다.

[위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에 있다. 조남동 응달말 뒤편의 쇠머리산 정상 부근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형태]

묘는 부인과 합장한 단분(單墳)이다. 봉분 앞에 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로 높이 1.95m의 문인석·동자석·망주석이 있다. 봉분 우측으로는 묘표(墓表)가 있고, 묘역 좌측 아래에 묘갈(墓碣)이 건립되어 있다. 모든 석물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석물의 양식과 문양이 정교하다. 특히 둥근 모양의 높이 48㎝의 향로석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금석문]

봉분 우측의 묘표는 사각의 기단 위에 비신(碑身)의 위가 둥근 형태이다. 묘표의 높이는 1.75m, 백(白)대리석 비신의 높이는 1.45m이다. 묘표에는 음기(陰記)와 입석 연대가 없어 언제 세웠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죽은 1678년(숙종 4) 무렵으로 추정된다.

묘역 좌측 아래에 1787년(정조 11) 건립된 묘갈이 있다. 묘갈은 사각의 기단과 비신에 팔작지붕의 개석(蓋石)을 올린 형태이다. 높이는 2.34m이고,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신의 높이는 1.54m이다. 비문의 전액(篆額)에는 ‘행예조판서 풍양군 증시정장 장공묘갈(行禮曹判書豊陽君贈諡正張張公墓碣)’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제(碑題)에는 '유명조선국 숭정대부 행예조판서 겸 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풍양군 증시정장 장공묘갈(有明朝鮮國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豊陽君贈諡正張張公墓碣)'이라고 쓰여 있다. 비문은 의정부우찬성 박필주(朴弼周)가 지었으며 이한진(李漢鎭)이 쓰고 전액(篆額)하였다.

[현황]

동자석이 훼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석물과 묘역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묘갈 가운데 예서체(隸書體)로 쓰여진 것이 거의 없어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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