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룡 장군 묘 및 신도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19
한자 金俊龍將軍墓-神道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and Tomb of General Kim Joonry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138-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창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642년연표보기 - 김준룡 묘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86년 - 김준룡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42년 - 김준룡 사망
이장 시기/일시 1972년 - 김준룡 묘 이장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5월 31일연표보기 - 김준룡 장군 묘 및 신도비 시흥시 향토유적 제13호 지정
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138-1 지도보기
원소재지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성격 묘소와 신도비
양식 원형 합장 단분
관련 인물 김준룡
소유자 원주 김씨 종중
관리자 원주 김씨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시흥시 향토유적 제13호

[정의]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김준룡의 무덤.

[개설]

김준룡(金俊龍)[1586~1642]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수부(秀夫)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두남(金斗南), 어머니는 담양도호부사 김희필(金希弼)의 딸이다. 1608년(선조 41) 2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그 후 법성포만호(法聖浦萬戶), 마량진첨절제사(馬梁鎭僉節制使)를 거쳐 1617년(광해군 9) 인동부사에 제수되었다. 1628년(인조 6) 황해도병마절도사와 1631년(인조 9) 북병사(北兵使)를 지내고, 1636년(인조 1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군사를 이끌고 직산을 경유하여 광교산에 주둔하며 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은 오래도록 포위되었는데, 이때 승전 소식으로 성 안에서 안정을 되찾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초 청군 수만이 다시 공격해 오자 많은 적병을 사살하였으나, 아군의 병력 손실도 컸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유배를 갔다가, 최명길(崔鳴吉) 등의 요청으로 사면되었다. 1640년(인조 18) 김해도호부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양(忠襄)으로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위치]

김준룡 장군 묘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138-1에 있다. 시흥시 거모동 거모사거리에서 시흥경찰서 방면으로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군자동 구지정마을의 도로변에 신도비가 보인다. 묘는 신도비 위쪽 100m 이내 지점의 산 중턱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변천]

김준룡 장군 묘는 원래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에 있었으나 1972년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지금의 시흥시 군자동 산138-1]로 이장하였다.

[형태]

부인과 합장한 단분(單墳)의 형태이다. 봉분 앞에는 비신(碑身)이 없는 방부(方趺)와 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 한 쌍, 봉분 좌측에 새로 세운 비석이 있다. 좌우에 동자석 한 쌍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망주석도 새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문인석은 높이가 1.53m이며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형태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

[금석문]

1685년(숙종 11) 신도비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묘에서 서쪽으로 100m 이내의 길가에 세워져 있다. 높이 2.4m의 신도비는 2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석(屋蓋石)을 올렸다. 첫 번째 기단은 땅속에 일부가 묻혀 있고, 두 번째 기단의 전면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높이 1.4m, 폭 65㎝, 두께 22㎝의 비신은 오석(烏石)이며 옥개석은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전액(篆額)에는 '贈兵曹參判行北道節度使金公神道碑銘(증병조참판 행북도절도사 김공신도비명)'이라 새겨져 있고, 비제(碑題)에는 '조선국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장군수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도호부사 김공신도비명 병서(朝鮮國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將軍守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都護府使金公神道碑銘幷序)'라고 되어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우의정 허목(許穆)이 짓고, 글씨와 전자(篆字)는 이조참판 오시복(吳始復)이 썼다. 비문의 말미를 보면 1680년(숙종 6) 비문을 쓰고, 5년 후인 1685년 신도비를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광교산에 경기도기념물 제38호 김준룡 장군 전승지 및 비가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조가 화성(華城)을 축조할 당시 축성 책임자 채제공(蔡濟恭)이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간 사람들에게서 병자호란 때 광교산 전투에서 큰 공훈을 세운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바위을 갈아 ‘충양공 김준룡 장군 전승지(忠襄公金俊龍將軍戰勝地)’라 새기고, 그 좌우에 ‘병자호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丙子胡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 전승 내용을 새겨 놓았다.

[현황]

김준룡 장군 묘 및 신도비는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문인석은 조선시대 석물 및 복식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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