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42
한자 近代敎育
영어공식명칭 Modern Educ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훈도

[정의]

1894년 갑오개혁에서 1945년 광복까지 경기도 시흥시에서 이루어진 일반 대중 중심의 교육.

[개설]

갑오개혁 이후 근대 대중 교육의 시대가 열렸다. 초기 근대 교육의 보급은 주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05년 교육 계몽 운동의 열기 속에서 경기도 시흥 지역에도 여러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는 1906년 통감부(統監府) 설치 이후 애국적인 교육을 차단하는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면서 사학을 통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시흥 지역에는 공립 보통학교가 3곳뿐이었으며 중등학교는 없었다. 이에 따라 시흥 지역 곳곳에는 학교 교육에서 소외된 아동과 주민을 위한 야학과 강습소가 운영되었다.

[근대 교육의 도입]

갑오개혁은 교육관과 교육제도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계기를 마련하였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신분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국민이 교육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양반 중심의 교육을 벗어나 대중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선언된 것이다.

시흥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901년경 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속한 무지내에 세워진 무지리여학교[여자 매일학교]이다. 무지리여학교는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1909)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근대 교육의 보급에 힘을 쏟았다. 메리 스크랜턴은 무지내교회가 부설한 학교에 조신실을 교사로 파견하고, 조신실의 월급을 자신이 부담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시대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교육]

일제는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한 후 교육 부문에서도 식민지 교육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식민지 교육은 실용 교육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조선인에게 초보적인 문자 해독 능력을 가르쳐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민족 교육과 정치적 관심을 근원적으로 봉쇄하여 저항을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교육 계몽 운동으로 생겨난 사립학교를 억압하였다. 무지리여학교는 사립학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 일제는 또한 민족 교육을 못하도록 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내려 일어 교육과 일본 문물 주입에 중점을 두었다. 학제는 조선인 학교의 경우 보통학교 3~4학년, 고등보통학교 4년, 여자 고등보통학교 3년, 전문학교 3~4년으로 하여 일본 학생과 차별하였다.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려면 보통학교 6년 과정을 수료해야 했으므로, 조선 학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해도 상급 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일본 학생이 다니는 보통학교는 6년제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인 보통학교를 4년제에서 6년제로 바꾸었으나, 실제로는 4년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 시흥 지역에는 중등 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는 한 곳도 없고, 초등 교육기관인 공립 보통학교만 3개교가 있었다. 1920년 설립된 소래공립보통학교, 1923년 설립된 군자공립보통학교군자공립심상소학교였다. 일본 학생이 있는 소래공립보통학교는 6년제, 조선인만 있는 군자공립보통학교는 4년제, 군자공립심상소학교는 1년제 학교였다. 군자공립보통학교 학부형들은 1924년부터 6년제로 학년을 연장해 달라는 운동을 벌였으나, 1937년에야 6년제가 되었다.

조선 사회의 교육관은 이미 근대적으로 바뀌어 있었고, 사회적 진출의 길도 학교 교육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체제가 되어 있었으나, 시흥의 교육 수요에 비해 학교 수가 매우 적었다. 여기에 3.1운동 이후 문화 운동 차원에서 야학과 강습소를 마을마다 세워 근대 교육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 번졌다. 시흥 지역에서도 군자면 죽율리[지금의 시흥시 죽율동]에 1926년경 설립된 죽율 야학을 비롯해 논곡 강습소, 오현 강습소, 상곡 강습소, 흥업 강습소 등이 세워져 취학하지 못한 아동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 계몽 운동의 전개]

시흥 지역에 근대 교육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교육 계몽 운동을 통해서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강제 체결 직후 조선의 젊은이를 애국심이 충만한 인재로 키워야 한다는 교육 계몽 운동의 바람이 불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사립학교를 세우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대한제국의 고종도 1906년 광학조칙(廣學詔勅)을 반포하였고, 지방관과 지역 유지들이 광학조칙에 호응하여 학교 설립에 나섰다.

시흥 지역에서도 1906년 정윤영(鄭允永)이 인천 황등천면 중림리[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세운 학교를 시작으로, 1908년에는 황등천면 두곡리[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전우태(全宇泰)가 창흥측량학교(昌興測量學校)를 설립하였다. 인천부 신현면[지금의 시흥시 포동]에는 1908년 엄선영(嚴選永)이 흥인의숙(興仁義塾)을 설립하였고, 정형택(鄭炯澤)과 정우택(鄭禹澤) 형제가 진명의숙(進明義塾)을 설립하였다. 이들 사립학교는 한문과 성리학을 제외하면 주로 근대 신학문을 가르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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