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40
한자 君子鹽田
영어공식명칭 Gunja Salt Pon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주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군자염전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군자염전 폐쇄
성격 염전
면적 570.3㏊[1925년]

[정의]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을 비롯한 주변 일대의 천일염을 생산하였던 염전.

[건립 경위]

전통적인 소금 생산 방법은 가마솥에 바닷물을 끓여 얻는 것이었는데 이 제조법은 높은 생산비 때문에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값싼 중국산 소금이 수입되다가 천일염이 생산된 것은 1907년 인천에 주안염전이 조성된 이후이다. 일제는 이를 더욱 확대하고자 염전 조성에 유리한 경기만을 주목하여, 1925년 시흥 지역 일원에 군자염전을 조성하였다.

[변천]

1925년 570.3㏊에 달하는 방대한 군자염전이 만들어졌다. 이후 군자염전은 이미 천일염을 생산해 왔던 인근 인천 주안·남동염전과 합쳐서 1933년경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런 성과는 1930년대 중반 인근 포동·방산동 일대에 소래염전 조성으로 이어졌다.

광복 이후 군자염전은 1961년 12월 ‘염전매법’이 폐지됨으로써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기존의 염전매는 종지부를 찍고 1962년 1월부터 제염 사업은 완전히 민영화로 바뀌었다. 이후 군자염전은 최전성기로 들어섰다. 1965년 전체 염전 면적 약 2,000㏊ 중에서 약 85%인 1,664㏊가 경기만 연안에 집중된 상태였다. 당시 군자염전은 603㏊로 비슷한 규모의 소래염전과 함께 전국 염전의 58%를 차지하였다. 군자염전의 천일염 생산량은 남동염전, 소래염전과 함께 우리나라 총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이후 군자염전의 위상은 약화되었지만 1990년대 초까지도 꾸준한 생산량을 보였다.

전라남도의 소금 생산 비중이 높았지만 1990년대 초 남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염전은 군자염전을 비롯하여 인근 염전이었다. 즉, (주)성담이 관리하는 인천 남동구에서 경기 시흥시 월곶동·장곡동·방산동·포동으로 이어지는 염전 면적은 5.71㎢로 경기도 염전의 약 32%를 차지할 정도였다.

[구성]

5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25년에 조성된 군자염전의 구성 현황은 다음과 같다.

위치는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정왕리[지금의 시흥시 정왕동] 지광간석지(地光干潟地), 공사 면적은 946정보[9.38㎢]이며 염전 면적은 575정보[5.71㎢]이다. 제방의 총 길이는 약 11㎞, 공사 기간은 1921년 11월부터 1925년 3월까지 3년 5개월이며 공사비는 141만 원, 천일염 예상 생산량 5,000만 근[3만 톤], 공사 소요 인원 60만 명이었다. 소요 예산과 공사 담당자는 조선총독부 관리와 전매국 소속의 일본인이 맡았다. 이후 증·개축 등의 과정을 거쳤고, 꾸준히 천일염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염전으로 거듭났다.

[현황]

군자염전은 1925년 조성 이후 1996년 폐쇄될 때까지 70년 이상 지속적으로 천일염을 생산해 왔다. 군자염전은 시흥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시흥 지역 해안선의 경관을 대부분 바꿀 정도였고 주민들의 생업과 환경에 미친 영향 또한 대단하였다. 대규모 염전이 들어서면서 염부 노동자로 중국인과 전쟁 이후 정착한 평안도 출신 사람들이 속속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이 새롭게 생겨났다. 산출된 소금을 일본과 국내 각지로 이동하고자 수인선(水仁線)을 부설하였다.

이렇듯 군자염전은 식민지 수탈이 점철된 아픈 과거이면서 동시에 이곳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역동적인 역사 현장이다. 군자염전은 염전 인근 주민들의 주 생업터이자 삶의 터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산 역사 현장을 기념하고 보존하고자 인접한 장곡동시흥갯골생태공원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