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32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선사,고대,고려,조선,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주혁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경기도 시흥시의 변천 과정.

[개설]

시흥시는 경기도 중서부에 있는 지방자치단체로 옛 시흥 지역은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 일부와 경기도 안산시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구체적으로 고려시대에는 인주(仁州)와 안산현(安山縣)에 해당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과 인천부(仁川府)에 속했던 곳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기존의 안산군·과천군·시흥군을 합쳐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 현대 들어 일부 구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고 1981~1989년 사이에 일부 지역이 광명시, 안산시, 과천시, 군포시, 의왕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다. 1989년 1월 나머지 구역이 시흥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시흥의 옛 지명]

전통 시대 시흥 권역의 전체 변화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장이었다. 고대에는 시기별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지배 영역으로 바뀌었다. 또한 전통 시대에는 들고 나는 행정구역의 폭이 매우 컸다. 시흥 권역을 가리키는 명칭 또한 자주 바뀌었다.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현 시흥시 지역을 비롯하여 전통시대 시흥군에 해당하는 옛 지명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하여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잉벌노현(仍伐奴縣)[지금의 서울시 금천구와 광명시 일원], 율목군(栗木郡)[동사힐(冬斯肸)이라 하며 지금의 안양시와 과천시 일원], 장항구현(獐項口縣)[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 하며 지금의 시흥시와 안산시 일원]이 설치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757년(경덕왕 16) 각각 곡양현(穀壤縣), 율진군(栗津郡), 장구군(獐口郡)으로 개칭되었다.

[선사시대]

지금의 시흥시 일원의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계수동, 매화동, 월곶동 등의 유적지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1980년대 시화지구 개발 사업 당시 조사된 시흥 오이도 유적, 2004년 능곡지구 택지 개발 사업 당시 발견된 능곡동 선사 유적이 있다. 시흥 오이도 유적은 섬 전체에 조개더미[패총(貝塚)] 유적이 분포되어 있는데,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경제 생활에서 어로(漁撈) 부분이 중요한 생활 활동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능곡동 선사 유적은 집터 24기가 발굴된 마을 유적으로, 지금까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집터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간석기[마제석기(磨製石器)]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고인돌과 집터 등이 발굴된 능곡동, 정왕동, 계수동, 과림동, 군자동, 금이동, 논곡동, 매화동, 안현동, 조남동 등에 분포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계수동 고인돌, 군자동 고인돌, 금이동 고인돌, 조남리 지석묘 등이 있다. 조남리 지석묘와 가까운 산지, 군자동 고인돌과 가까운 거모동 등지에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능곡동 마을 유적 발굴 조사 시에도 파괴된 청동기시대 집터 2~3기가 발견된 점을 비추어 볼 때 시흥 지역은 청동기 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집단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철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시흥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점과 시흥시와 인접한 화성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철기시대 유적이 발굴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초기 철기시대에 시흥 지역에도 상당한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시흥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남진 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장수왕 63)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하고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백제 성왕이 551년(성왕 29) 신라 진흥왕과 협공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회복할 당시 백제의 영역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553년(진흥왕 14) 한강 하류 유역을 기습하여 점령하면서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장구군이 안산현(安山縣)으로 바뀌었다. 한편 시흥(始興)이란 명칭이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고려 성종대이다. 『고려사』와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에 따르면, 성종 때 금주의 이칭으로 시흥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231년(고종 19)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대몽 항쟁기 당시 몽골군이 1256년(고종 43) 6차 침입해 왔을 때 삼별초(三別抄)가 소래산 부근에서 몽골군을 기습하여 격퇴하였다. 소래산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삼별초가 육지로 나와서 몽골군에게 승리한 첫 싸움이었다. 소래산에서 삼별초가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한 데에는 지역 주민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제1324호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 입상과 사적 제413호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가 있다.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는 고려시대 시흥 지역의 호족 등에 의해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시흥 지역은 조선시대 안산군(安山郡)인천부(仁川府)에 속해 있었다. 군자·수암권은 안산군에, 소래권은 인천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들어 경기도가 좌도와 우도로 나뉠 때 시흥 지역은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시흥시 지역은 안산군의 북서쪽[잉화면·초산면·마유면·대월면]과 인천부의 남동쪽[신현면·전반면·황등천면]에 해당하였다. 안산군과 인천부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크고 작은 행정구역 변화가 있었다. 그러다 1795년(정조 19) 읍호(邑號)가 시흥현(始興縣)으로 바뀌면서 시흥이란 명칭이 구체적인 행정 지명으로 부각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인천부에 속하여 시흥군·과천군·안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고종 33) 3군 모두 4등군으로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시흥 지역은 조선시대에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수산물이 토산품의 주류를 이루었고, 어업과 염업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대규모 간척 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왕의 외척 가문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중앙 정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가문이 성쇠를 거듭하였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시흥군·안산군·과천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이 되었다. 오늘날 시흥시의 구역을 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즉, 시흥시의 변화상을 크게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면 1914년 이전과 이후라고 할 만큼 큰 변화가 있었다. 그 이전의 시흥 권역은 지금의 시흥시 행정구역과는 관련이 없다. 즉, 전통 시대의 시흥 권역은 서울특별시 남서부, 인천광역시 일부, 경기도 안산시 등을 가리킨다. 1914년 이후의 시흥 권역은 서울특별시 남서부, 인천광역시와 안산시의 일부, 과천시·의왕시·광명시·안양시·군포시 등을 모두 아우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시흥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3.1운동 당시인 1919년 3월 30일과 31일 수암면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다. 4월 4일에는 군자면 거모리에서, 4월 6일에는 군자면 장현리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이들 시위로 인해 37명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시흥 지역은 근대 이전부터 1945년 광복될 때까지 농업이 주산업이었다.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면서 현 시흥시 지역에 4곳의 수리조합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농업은 근대적으로 변화하였으나 소작농의 비율이 높아져 농민의 경제적 상황은 개선되지는 못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이후 군자염전소래염전이 조성되었고, 시흥시 지역은 염전의 고장이 되었다.

[광복 이후]

광복 이후에도 행정구역의 변화가 많았다. 서울특별시 영역이 팽창하면서 빠르게 인근의 경기도 지역을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1949년 8월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때 시흥군의 일부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신동면과 동면의 5개 리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또 다른 변화상으로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시흥군 지역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면이 읍으로, 읍이 출장소로, 그리고 시로 승격하여 시흥군에서 분리되는 양상이었다.

1970년 6월 서면에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1979년 5월 남면이 군포읍으로,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수암면군자면의 13개 리와 화성군 반월면 일부에 반월지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0년 12월 의왕면과 소래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7월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이 합쳐져서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1982년 6월 과천면에 과천지구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6년 1월 과천시로 승격되었고, 반월지구출장소도 안산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이렇듯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시흥의 인구가 급증한 결과, 안양·광명·안산·과천 등이 차례로 시로 승격되어 시흥에서 분리되었다.

[시 승격 이후]

1989년 1월 1일 시흥군의 군포읍과 의왕읍이 시흥군에서 분리되어 각각 군포시와 의왕시가 되었다. 그리고 시흥군 소래읍과 군자면·수암면이 합쳐져서 시흥시로 승격되었다. 1996년 시화국가산업단지[시화공단]가 조성되어 기업들의 입주가 시작되면서 시흥시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으며 인구도 많이 늘어났다. 시흥시의 인구수는 2018년 4월 말 기준으로 46만 5374명이다. 이는 1989년 시 승격 당시 9만 3284명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37만 2090명이 증가한 것이다.

2018년 현재의 시흥시를 특징짓는 면은 경기도 남서부 지역에 위치한 도농 복합 도시, 서해안 시대에 바다와 인접한 곳, 중소기업이 밀집한 경인 공업 지대의 배후인 공단 밀집 지역, 신시가지 조성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고층 아파트 건립 등으로 모아진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4.18 고지명 수정 율목군(栗木郡)의 이칭을 동사힐현에서 동사힐(冬斯肸)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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