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29
한자 魚梁|漁梁
영어공식명칭 Weirs|Fishpot|Kiddle|Heck
이칭/별칭 어전,어전 어업,어살,방렴(防簾),어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조선
집필자 방문식

[정의]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 지역에 있었던 물살을 조정하여 물고기를 잡도록 한 어로 도구 혹은 그것이 설치된 장소.

[개설]

어량(魚梁, 漁梁)은 물이 흐르는 곳에 물살을 제한하여 그곳에 함정 어구(漁具)를 놓아 고기를 잡도록 한 곳을 일컫는다. 어량은 어구를 설치한 모양이 교량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성종 때부터는 어량보다는 어전(漁箭)이라는 명칭이 실록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무렵의 어민들은 어량을 ‘어살’이라고 부르고 있었기에 왕실에서는 한문식 표현인 어전이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어전(漁箭, 魚箭)은 ‘어살’이라고도 부르는 함정 어구류의 일종이다. 서해안처럼 조석 간만의 차가 큰 해역에서 사용되는 어로 도구이자 방식이다. 간조 때나 수심이 얕아지는 곳에 고정목을 박고 대나무 발이나 그물로 함정을 놓았다가 밀물 때 들어온 어패류를 썰물 때 가두도록 하는 방식이다.

한편 어량은 흔히 양(梁)이라고도 약칭하였다. 조선 왕조에서도 어량, 수량(水梁) 등으로 불렀다. 조선 전기 『태종실록』에 따르면, ‘수량’은 내수면의 큰 하천에서 이용하던 고기잡이 시설, 즉 내량(川梁)을 별도로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어전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성종 대를 전후하여서는 시설을 설치한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어전(魚箭)으로 통칭하였다. 전근대 사회에서 어전이라는 용어는 설치 장소와 상관없이 물고기를 잡는 도구를 의미한다.

어전 어업의 전성기에는 어량 또는 어전이 어업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어량 또는 어전은 고기잡이 도구 자체보다 그것을 설치하는 어장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는 세금으로 어량을 거두어들이는 관청으로 사재감(司宰監)을 두기도 하였다.

[어업과 어량의 역사]

어량은 어업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업의 역사에서 어량이 나왔고, 어량은 바닷가를 생활 근거지로 하였던 시흥 지역을 비롯한 서해안 주민들의 어로 생활 이력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어업을 개략하면, 장소에 따른 구분과 역사적인 변천 과정으로 축약할 수 있다.

활동 장소에 따라 내수면 어업(內水面漁業)과 해면 어업(海面漁業)[바다 어업]으로 나뉜다. 내수면 어업은 강이나 호수 및 저수지, 해면 어업은 바닷가에서 어업 활동을 벌여 바다 어업이라고도 한다. 바다 어업은 해안과의 거리에 따라 연안 어업, 근해 어업, 원양 어업으로 세분된다. 역사적으로 어업은 내수면 어업에서 바다 어업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신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내수면 어업이 지배적이었고, 조선 전기에 이르러 바다 어업이 확대되어 갔다.

조선 전기에는 바닷가에 어량을 많이 설치하여 어물을 획득하였다. 지역적인 어업의 경향을 살펴보면 동해안보다 서해안과 남해안이 어업에 따른 이득이 많았다. 특히 서해안은 완만한 경사지에 어량을 설치하여 바닷고기를 주로 잡았는데 어획량이 많았다.

[시흥 지역의 어업과 어량]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관아에서 어전을 설치하여 백성이 관리하도록 하고, 등급별 대장(臺帳)을 만들어 호조·도(道)·고을에 비치하여 일정한 어전세를 거두었다. 조선시대 이래 시흥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시흥 지역이었던 안산인천 또한 어량 때로는 어전이라는 항목을 두어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파악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시흥 지역인 조선시대 안산인천 지역은 『태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부터 수도와 가깝고 상품의 어물이 나오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어물이 나오면 먼저 중앙에 진상(進上)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 중 안산인천 등의 서해안은 경작보다 어량과 염업에 의지하는 바가 컸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조선 전기 안산인천에는 어량이 각각 5개, 19개였다고 한다. 어량에서 잡히는 중요 어산물은 송어, 민어, 숭어, 조기, 농어, 참치, 홍어, 큰새우, 중새우, 모시조개, 굴, 낙지 등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내수면 어업보다 바다 어업이 전면화되었다. 어업도 주로 바다에서 이루어졌고, 어류도 바닷고기가 주종을 이루고 어획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는 어량을 비롯한 내수면 어업 중심의 어로 도구를 비롯해 바다 어업의 어선과 어망 등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다.

조선시대 가장 많이 잡힌 어류는 명태, 조기, 청어, 멸치, 대구 등이었다. 특히 조기는 서해안의 고군산도, 위도, 연평도에서 가장 많이 잡혔으며 시흥과 인천에서도 많이 잡혔다. 조선 후기 시흥 지역의 어획 종류는 『여지도서』의 인천 물산 항목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는 “소금, 농어, 홍어, 광어, 송어, 조기, 황조기, 호독어(好獨魚), 민어, 상어, 붕어, 전어, 망어, 숭어, 참치, 병어, 오징어, 낙지, 조개, 황합(黃蛤), 죽합(竹蛤), 해양(海䑋), 토화(土花), 석화(石花), 소라, 게, 청게, 큰새우, 중새우, 쌀새우[白鰕], 자하(紫蝦), 어표(魚鰾), 사자족애(獅子足艾)[사자 발바닥 모양처럼 생긴 쑥]” 등이 주산물로 꼽히고 있다. 즉, 시흥 지역은 내수면 어업에서 바다 어업으로 나아감에 따라 바닷고기의 종류가 많아지고, 농업과 더불어 어업이 중요한 세금원이자 생활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시흥 지역에는 어량 어업이 명맥만 남아 있지만, 어량 어업은 과거 서해안 지역 어업 생활사의 복원과 국가 경제사를 연구할 때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전근대 어업에서 어량을 활용한 어물 생산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고, 수취 체제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량 어업은 생산 수단의 현황과 규모, 수량 확인이 용이하였기에 국가에서는 계획적으로 설비를 투자하고 어물 생산과 대량 유통을 기획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려 이래 조선 전기까지 국가 과세 정책의 주요 대상을 어물 생산 시설인 어량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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