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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08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심우일

[개설]

‘소래(蘇萊)’라는 명칭은 인천광역시, 부천시, 시흥시에서 모두 사용되고 있지만 시흥시에는 소래산을 비롯해 소래염전, 소래산 편사 놀이, 소래문학회, 소래초등학교 등 시흥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 ‘소래’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소래’에 대한 지역민의 애정과 애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천, 부천, 그리고 시흥의 ‘소래’]

행정구역상 소래산은 현재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과 시흥시 대야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인천, 일제강점기인 1914부터는 부천, 1940년부터는 다시 인천, 1973년부터는 인천과 시흥에 걸쳐 인연을 맺었다. 소래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사』 「세가 권 24」 “대부도 별초가 밤에 인주 지경 소래산 밑에 나와 몽골병 백여 명을 쳐서 쫓았다[大府島別抄 夜出仁州境蘇來山下 擊走蒙兵百餘人].”이다. 이후 한자로 소래산(蘇來山) 또는 소래산(蘇萊山)으로 표기하여 왔고, 주변 지역의 명칭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시작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소래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20년 소래공립보통학교, 1929년 소래수리조합, 1936년 소래염전, 1937년 소래역이 소래라는 명칭을 썼다. 특히 소래염전 운영을 총괄하는 조선총독부 전매국 주안출장소 소래파출소와 수인협궤선의 소래역이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677-3 일대에 들어서면서 소래라는 명칭이 이 지역에서 일반화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실향민 6가구 17명이 돛단배를 대면서 포구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던 소래포구도 등장한다. 최근에는 소래생태습지공원, 소래포구성당, 인천소래초등학교 등 소래라는 명칭을 인천광역시 남동구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소래포구가 전국적으로 이름난 포구로 소문이 나면서 옛 소래면사무소와 소래읍사무소가 소재했던 시흥시 신천동 일대와 명칭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기도 하고 있다.

[소래산의 문화 자원]

1.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 입상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산140-3에 있으며 2001년 9월 21일 보물 제1324호로 지정되었다. 소래산 중턱의 병풍바위[장군바위] 암벽에 선각(線刻)되어 있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화사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그 내부는 덩굴무늬[唐草紋]로 장식되어 있다. 원통형의 관을 쓴 보살은 고려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으로, 이를 통해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 입상의 조성 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 높이 12.3m의 거불(巨佛)로 우리나라 석불 조각에 있어서 대단히 큰 규모이다. 얕은 선각임에도 불구하고, 기법이 우수하고 회화적인 표현이 뛰어난 세련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풍화작용으로 인해 마멸이 진행되고 있어 그 형상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불교 문화와 관계가 깊다.

2. 소래산 바위

『우곡일기 야언기략(愚谷日記野言記略)』 「야언기략 권지이(野言記略卷之二) 병자년(丙子年)」에 보면, “경기 인천 땅 소래산 정상에 큰 돌이 있는데, 두 골짜기 사이로 굴러서 서쪽 기슭에 섰다. 그 사이가 600~700보가 되며 돌이 지나간 곳은 도랑이 되었는데 깊이가 수 척이나 된다[京畿仁川地蘇來山上峰有大石 移徒過兩谷立於西麓上 其間畿六七百步所行成溝深可數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일은 1636년(인조 14년) 3월 27일에 발생한 것으로, 그해 12월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현재 커다란 바위가 소래산에 있지만, 실제로 이야기와 연관된 바위인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3. 소래산 별장

소래산 아래 시흥시 신천동 산12번지 일대는 진양 하씨(晉陽河氏) 문중의 세거지로서 소산서원, 하연 선생 묘, 하우명 효자정각 등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기에는 별장도 존재했던 곳이다. 『사숙재집(私淑齋集)』 「소래하중추정문기(蘇萊河中樞旌門記)」에는 “아버지 하자종의 상(喪)이 끝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소래산 선영 옆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와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들여 참배하였다[服闋奉母夫人 歸蘇萊山塋側別墅 朝夕交致敬謁].”는 내용이 있는데, 별서(別墅)가 별장인 셈이다. 이와 같은 효행을 실천한 사람은 하연 선생의 아들인 하우명이다. 『성종실록』 「성종 4년 6월 5일」에 “어버이가 돌아가자 여묘살이 3년을 하면서 직접 땔감을 져다가 밥을 지었고, 복(服)을 마치자 묘 곁에 영당을 만들고, 삭망에 전(奠) 드리기를 폐하지 않았으며, 무릇 계절의 물건이면 반드시 이를 올렸으니, 그 효성이 순박하고 지극합니다[親死廬墓三年負薪親爨 服闋構影堂於墓側 不廢朔望之奠凡節物必薦之其孝誠純至].”라고 기록한 것처럼 효성을 다하는 하우명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후 하우명은 효자로 인정받아 효자정각이 세워지고, 이곳은 유가적 전통의 효 문화가 깊게 배인 장소로 알려지게 된다.

4. 소래산 편사(便射) 놀이

사정(射亭) 사이에서 한 사정이 한 편씩 편성하여 활의 기예를 비교하여 승부를 다투지만, 여흥까지도 즐기는 일종의 축제가 편사 놀이다. 현대 스포츠의 홈 앤드 어웨이 방식과 같이 활터가 서로 방문하여 두 번에 걸쳐 편사를 치른다. 소래산 주변에도 사정, 즉 활터가 있는데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 소재 남수정(南壽亭)이다. 또한 시흥시 방산동에도 소래정(蘇萊亭)이라는 활터가 있는데 두 사정 간에 매년 4월 서로 방문하여 편사 놀이를 한다.

[소래의 이름으로 배우다]

1. 소래초등학교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조선에 대한 통치 정책이 문화정치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과 더불어 한국인들의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학교 설립도 늘어났다. 당시 소래면 신천리 뱀내장터와 그 주변 마을 유지들이 앞장서서 기부금을 모았는데, 당시 돈으로 4,000원이나 되는 큰돈이 모금되었다. 이 돈을 바탕으로 1920년 3월 16일 소래공립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지역 주민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서 학교 건축용 재목도 기부하고 부역에도 동참하여 기와집으로 된 건물을 완성하여 개교하였다. 이 학교가 시흥시 호현로27번길 14에 소재한 지금의 소래초등학교로 시흥 지역 근대 학교 교육의 출발이었다. 소래초등학교는 2018년 5월 현재 19학급 445명의 학생과 47명의 교직원이 ‘변화와 도전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소래 교육’이라는 목표를 갖고 교육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2. 소래중학교

1952년 12월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미산리[지금의 시흥시 미산로 127번길 7] 소재 미산교회 최진규 목사가 교회 내에 성산중학원을 설립하여 비인가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성산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비인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소래중학교 설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당시 소래면 내 모든 가구가 가구당 500환씩 갹출하여 공립 중학교 설립에 온 힘을 쏟았다. 마침내 1959년 3월 12일 소사중학교 소래분교로 개교하고, 1960년 2월 공립 소래중학교로 6학급 인가를 받아서 성산중학원소래중학교로 전환하였다. 소래중학교는 2018년 5월 현재 27학급 861명의 학생과 80명의 교직원이 ‘꿈을 가꾸며 더불어 살아가는 창조적 소래인 육성’을 교육 목표로 열정 넘치는 교육을 펼치고 있다.

3. 소래고등학교

1981년 1월 15일 소래종합고등학교가 9학급으로 설립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1997년 3월 1일 소래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종합 고등학교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탈바꿈하며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수도권 및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합격하는 학생들이 증가하였다. 2002년에는 부천 지역이 고교 평준화를 하면서 부천으로 고교 진학을 하던 시흥 관내 중학교의 우수 학생들이 소래고등학교에 대거 입학하였다. 아울러 2009년 3월 1일 기숙사인 인재숙을 운영하면서 소래고등학교의 명문대 진학률이 상승하여 관내 및 인근 지역에서도 진학을 희망하는 학교가 되었다. 2012년 10월 1일 야구부를 창단하였으며, 2018년 5월 현재 44학급 1,247명의 학생과 129명의 교직원이 ‘참된 학력 신장으로 모든 학생이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소래로 모이는 사람들]

1. 소래문학회

1992년 10월 ‘언어의 밭을 일구고 꽃 피우는 모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립한 문학 동아리이다. 교사, 회사원, 정치인, 주부 등 참여 계층이 다양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두고 창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1993년 동인지 『소래문학』을 창간하여 매년 회원들의 시, 소설, 수필 등 활발한 문예 활동의 결과물을 실어서 발행하고 있다. 2000년에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여 온라인에서도 문학을 화두로 소통하고 있다. 이런 내부적인 활동 외에도 시흥 지역의 건전한 문화 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자 물왕 예술제, 연성 문화제의 백일장과 시 낭송회를 주관하는 등 크고 작은 문학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 소래정

소래정시흥시 방산동 산104-1번지에 소재한 국궁장(國弓場)이다. 소래산의 정기를 받은 곳이라는 의미로 소래정이라고 하였다. 활터가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단지 2014년 기준으로 사두(射頭)가 36대까지 배출되고, 1대의 임기가 2년이기에 역사가 70년 이상 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또한 초대부터 7대까지의 사두가 방산동 출신이어서 시작된 곳을 방산동으로 보고 있다. 방산동에서 시작하여 은행동 찬우물에서 활을 쏘다가 199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서 활을 쏘았다. 그러다가 2009년 지하 1층, 지상 2층, 그리고 과녁대 4개를 갖춘 최신식 활터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시흥시 유일한 9단 궁수인 이상진이 소래정 소속이며 매년 4월 인천광역시 남동구의 남수정과 편사 놀이를 한다.

[소래로 불리는 장소]

1. 소래염전

소래염전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전매국 주안출장소 소래파출소 소속으로 시흥과 인천에 걸쳐 있던 국영 염전이었다. 면적이 545㏊[5.45㎢]이고 염부들은 500여 명으로 인근의 군자염전 및 남동염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대의 천일염전 지대의 한 축이었다. 염전 축조는 1934년에 시작하여 1936년에 완공하였으며 1937년에 처음으로 353㏊[3.53㎢]의 면적에서 592만 3000근[355만 3800㎏]의 소금을 생산해냈다. 소래염전은 시흥 지역 사람들의 중요한 일터가 되었지만, 1995년 8월 31일 폐염전이 되었다.

2. 소래터널

시흥시 대야동과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에 소재한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상의 터널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원래 터널로 설계했으나 암석이 단단하지 않아 절개 공법으로 소래산을 깎아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소래산 일대 환경 보호를 목적으로 시흥 시민의 요구가 거세지자 1997년 2월 설계를 변경하여 1999년 11월 26일 소래터널을 완공하였다.

3. 소래철교

수인선의 철로 교량으로 시흥시 월곶동과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사이에 있다. 처음에는 경동철교로 개통되었지만, 후에 소래철교로 바뀌었다. 수인선의 단축 운행과 영업 정지 관계로 송도~한양대앞 간 26.9㎞를 1994년 9월 1일 폐지하면서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현재 철교는 인도교로서 소래월곶을 연결하는 통행로 역할을 하면서 소래포구, 소래어시장과 함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시흥 사람들의 소래산 살리기 운동]

1995년 10월 17일 『한겨레신문』에 ‘소래산 개발 명목 두 동강 수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생태계 보호는 생각하지도 않고 공사비 절감 때문에 소래산을 두 동강 내는 것은 인천과 시흥 시민의 마음을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기사문은 시흥 시민의 소래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는 정도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1995년 10월 초에 소래산을 절개하여 고속도로 건설을 시도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시흥 시민들은 공사 현장에서 농성과 함께 공사 중단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아울러 시흥 시민들에게 소래산을 지키기 위한 서명운동도 전개하여 절대적인 호응을 얻었다. 1995년 10월 23일 시흥시의회도 터널 공법으로 건설하라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또한 소래산 살리기 운동 과정 중에 시민 단체인 시흥환경운동연합이 1995년 11월 11일 창립 대회를 열었다. 시흥 시민들은 캠페인, 토론회, 공청회, 식목 행사 등을 벌이면서 소래산 살리기에 매진하였고, 1996년 4월 마침내 터널로 굴착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소래산 살리기 운동은 막을 내렸다. 현재 소래산은 여전히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힘차게 숨 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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