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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의 바다는 어떻게 도시가 되었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01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손승호

[개설]

경기도 중서부에서 경기만에 접한 시흥시는 간석지[개펄]가 발달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곳이다. 도시의 서쪽 해안가를 따라 아주 넓게 펼쳐진 간석지는 일찍부터 시흥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었다. 시흥시는 한반도의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광주산맥의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자리하여 고도가 낮은 구릉성 산지가 발달해 있고, 기복이 심하지도 않은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토대로 시흥시의 간석지는 경사가 완만한 형태이며 강수량이 적은 기후 조건과 결합되면서 염전으로 조성되거나 벼농사를 위한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고 경제 발전을 이루던 1980년대 들어 수도권에서는 서울로의 집중 문제를 해결하고 인구 및 산업을 서울 외의 장소로 재배치하기 위해 시흥의 해안가에 대단위의 국가산업단지 및 배후 시가지를 개발하게 되었다. 그 대상지는 해면 매립을 통해 땅을 만들기 쉬운 간석지 또는 염전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시흥시의 해안은 대부분 지역에서 매립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 자리에 산업단지나 주택, 시가지 등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시 공간이 조성되었다.

[바다를 땅으로 만들다]

완경사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서해안은 갯벌 형태의 간석지가 잘 발달해 있다. 경기만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시흥 지역의 바닷가에도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었으며 간석지는 해안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식량 창고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선사시대부터 해안가의 사람들이 갯벌에 서식하는 조개를 비롯한 어패류를 먹기 시작하면서 시흥 오이도 유적은 2002년 4월 1일 사적 제441호로 지정될 만큼 귀중한 조개더미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시흥 지역의 간석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간과 함께 공존해 왔지만,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간석지의 원형을 없애고 새로운 용도로 재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시흥 연안 해역은 간석지를 매립하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간석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었고, 해안선의 굴곡이 심한 동시에 해안가에 크고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간척 사업에 유리하였다. 또한 소규모의 구릉지가 분포하므로 방조제 축조에 필요한 돌이나 흙을 구하기도 쉬웠고, 간석지의 토질이 단단하여 방조제 축조나 토지 개발이 어렵지 않았다.

이러한 여건은 시흥 지역의 해안에서 크고 작은 간척 사업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시흥 지역에서 이루어진 초기의 간석지 매립은 1721년(경조 1) 지금의 시흥시 포동에서 하중동으로 이어지는 구릉지 사이를 연결하는 호조방죽을 조성한 후 매립하여 대규모의 농경지로 조성한 호조벌 사업이 있다. 호조벌 일대는 아직도 농경지가 많은 벼농사 지대로 남아 있다.

[바다를 염전으로 바꿔 소금을 만들다]

근대에 들어서 시흥 지역에서 실시된 간척 사업은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는 염전을 조성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시흥의 해안가에 염전이 조성된 시기는 1920년대부터이다. 지금의 시흥시 정왕동죽율동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은 후 간석지를 매립하여 1925년에 조성된 군자염전, 신천장현천 일대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1936년에 조성된 소래염전이 그것이다. 이들 염전은 인천의 남동염전과 함께 우리나라 제일의 염전 지대를 형성하면서 전국 소금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였다. 특히 군자염전은 1980년대까지 천일염을 생산했는데, 1960년대에는 면적이 6㎢를 넘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우리나라 소금 생산량의 10% 정도를 만들어냈다.

군자염전이 개발될 때 평안도 출신 사람들이 이주해와 거주하던 마을이 평안촌(平安村)이고, 그 남쪽에는 염전 노동자들이 살던 염부사마을이 있었다. 지금과 같이 밀집한 도시적 형태의 마을은 아니었지만, 일찍부터 염전에 인접한 지역은 거주자가 증가하면서 여느 농촌이나 어촌과는 달리 북적대는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흥 지역의 염전은 1990년대 중반에 대부분 사라졌다.

염전이 사라진 이유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국토 개발 계획에 의해 군자염전과 그 주변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대단위의 산업단지를 조성한 개발 사업 때문이다. 1977년부터 안산시의 반월국가산업단지가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접한 시흥시 해안가의 일부 지역이 1987년 시화지구 개발 사업 지구에 편입되어 공업 용지와 주거 용지로 전용되면서 염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화국가산업단지와 배후 시가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시화지구 개발 사업은 1984년부터 시작되어 1987년에 본격적인 매립 공사가 실시되었다. 이 사업은 서울의 공업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해 반월국가산업단지 서쪽으로 펼쳐진 해안을 매립하여 22.44㎢의 공업 단지를 조성하는 계획이었다.

소래염전은 시흥시의 도시 발달과 더불어 인천광역시를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이어지는 고속 교통망 건설 및 시흥의 시가지 개발 과정에서 서서히 사라졌으며,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고 소금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염전과 갯벌을 육지로 바꾸고 시가지를 만들다]

해안 매립이 본격화하면서 시흥 지역의 연안 해역은 1970년대 이후 크게 변화하였다. 과거에는 드나듦이 있던 해안선과 그 앞으로 넓게 펼쳐진 간석지로 구성되었지만, 지금은 해안선이 매우 단조롭게 직선화하였으며 광활하게 분포하던 간석지도 대부분 사라졌다. 육지로 바뀐 간석지에는 다양한 도시 시설이 들어섰다. 제일 먼저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섰고, 그 뒤를 이어 산업단지의 배후 시가지와 도로망이 구축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배곧 신도시가 개발되었다.

시흥 지역이 지금의 도시 공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은 시화지구이다. 시화지구는 서해안의 경기만 일대에서 시흥시와 안산시에 걸쳐 시행한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조성되었으며 1970년대 말부터 조성된 반월 특수 지역이 공간적으로 확장된 형태이다. 이 지역은 시화방조제 건설 이전까지 군자만으로 불리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운반하던 조운선(漕運船)의 경로였으며 중국과의 문화 교류 및 경제 교류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986년 시화지구 조성 계획을 수립한 후 1994년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시화호 북측에 대단위 간척지가 조성되었고 반월 특수 지역이 확대 지정되었다. 이후에는 기존에 건설된 시화국가산업단지에 연접하여 시화멀티테크노밸리[시화MTV] 개발 계획이 2001년 8월에 고시되었고, 이 사업은 2016년에 마무리되었다.

시흥 지역의 해안에서 1980년대에 진행되었던 도시 개발이 중소기업 위주의 제조업체가 입주하는 공업단지 개발에 집중되었다면, 1990년대의 도시 개발은 간석지를 매립하고 대단위 시가지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990년대 이후의 해안 매립을 통해 조성된 대표적인 시가지는 월곶 신도시배곧 신도시이다. 월곶 신도시신천경기만에 합류하는 지점을 1992년부터 매립하여 상가와 주택단지가 어우러진 시가지로 조성되었다. 배곧 신도시는 본래 1997년 군용 화약류 종합 시험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간척 사업이 시행되었던 군자 매립지에 개발되었다. 군자 매립지는 군용 시험장 설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2007년부터 추가적인 간척 사업을 시행하여 배곧 신도시로 탄생하였다.

시로 승격한 1989년 정왕동의 면적은 16.87㎢로 시흥 지역 전체 면적의 12.8%를 차지하였으며, 그 안에는 682만여㎡에 달하는 염전도 포함되었다. 시화지구 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시화호 북측의 간석지에 대한 매립이 완료됨에 따라 정왕동의 면적은 2015년 32.91㎢로 증가하였고, 시흥시 전체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4.2%로 확대되었다. 2015년의 면적은 1989년에 비해 두 배가량 증가한 것인데, 정왕동의 면적 증가는 해안가의 매립에 기인한다.

2017년 12월 기준으로 시흥시에는 17개의 행정동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경기만 연안의 간척 사업을 통해 새롭게 조성된 시가지를 관할하는 곳은 월곶동, 정왕본동, 정왕1동, 정왕2동, 정왕3동, 정왕4동 등 6개 동이다. 또한 2017년 12월 기준으로 시흥시에 거주하는 내국인은 41만 9664명이다. 이 가운데 해안가에 자리한 6개 동에 거주하는 인구는 17만 7856명으로 도시 전체 인구의 42.4%에 달한다. 안산동이 안산시로 이속된 이후인 1995년에는 해안가에 정왕동만 편제되었는데, 당시 정왕동의 인구는 6,587명으로 시흥시 전체 인구 13만 3324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 불과하였다. 그 이전인 1989년에는 정왕동의 인구가 4,668명이었다.

정왕동은 1999년부터 2004년 사이에 하나의 행정동에서 5개의 행정동으로 분동되었으며 2014년에는 군자동을 분리하여 해안가에 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월곶동이 신설되었다. 해안가에서 시가지가 발달하고 인구 증가에 따른 행정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여러 행정동이 추가로 신설된 것이다. 해안가에 자리한 지역의 인구 증가 속도와 시흥시 전체의 인구 증가 속도를 비교하면, 해안가에 조성된 신시가지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시가지와 분리된 도시 공간이 만들어지다]

전통적으로 농촌과 어촌의 성격을 유지해오던 시흥시는 경기만에 접한 연안을 중심으로 진행된 간척 사업으로 인해 자연환경은 물론 인문환경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자연 정화 기능을 수행하는 갯벌은 거의 사라졌지만,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세워지면서 건축물과 반듯하고 넓은 도로로 대변되는 인공 지형이 기존의 자연 지형을 대체하였다. 그리고 소래산 기슭의 완사면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달했던 시흥의 본시가지는 호조벌과 그 주변의 농경지를 향해 외연적으로 확장되기도 했지만, 농촌적 성격을 보이는 지역에서의 도시화는 미진한 수준이다. 즉, 시흥시의 시가지는 본시가지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농경지를 사이에 두고 바닷가에 새롭게 개발된 신시가지가 분포하면서 이원적 성격의 공간으로 발달하였다. 바닷가의 시가지에는 대단위의 산업단지나 상업 시설이 입지해 있기 때문에 내륙에 자리한 본시가지에 비해 생산성이 높은 특징이 있고, 자연 발생적인 시가지와 계획적인 시가지는 도로망이나 건물 배치에서도 차이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시흥시에서는 대규모의 간척 사업과 함께 도시화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간척 사업이 마무리된 지역에 시가지가 건설되면서 농촌적 성격이 강한 곳이 도시적 성격이 지배적인 공간으로 변화하였고, 도시 기능 및 규모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시흥시의 도시화는 자연 발생적으로 성장한 본시가지와 정해진 계획에 따라 시가지 개발이 이루어진 바닷가의 시가지 사이에서 단절성이 매우 강하게 발현된다. 이는 단순히 공간의 분리를 넘어 시흥시의 공간 특성 또는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시흥시는 기존의 시흥군에서 일부 지역이 분리된 상태로 나머지 지역 전체가 도시로 승격하면서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이 혼재하는 기형적인 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고속도로 및 고속화도로가 도시를 관통하면서 도로에 의해 도시 공간이 해체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일찍부터 시흥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소래산 자락의 시가지는 여전히 밀집 시가지로 발전하면서 외연적인 시가지 확장을 경험하고 있지만, 도시 전체의 60%를 넘는 개발제한구역은 시흥 시가지의 정상적인 도시 확장을 억제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시흥시 도시 공간의 단절은 해안가의 매립지를 중심으로 별도의 도시 공간이 창출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도시 공간의 분리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구의 국제적 이동이 활발해진 2000년대 들어 또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다. 바닷가에 조성된 산업단지는 제조업을 위시하여 중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2000년대 들어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다문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시흥시의 외국인 규모는 경기도에서 안산시와 화성시 다음으로 크며 시화국가산업단지가 자리한 정왕동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정왕동은 시흥시 내 등록 외국인의 70%가 거주하는 다문화 지역인데, 최근 들어 외국인 규모가 점진적으로 커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정왕본동정왕1동에 집중해 있으며 시흥시에서는 한국계 중국 국적과 베트남 국적 외국인의 새로운 클러스터가 형성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에 형성된 ‘국경 없는 마을’에 거주하던 외국인 가운데 일부가 시흥시로 주거지를 이전하는 현상이 진행되면서 정왕동 일대가 외국인 이주자들의 새로운 클러스터로 등장한 것이다. 외국인 이주자는 소수 집단의 형태로 도시 내에서 점적인 공간을 점유하는 게 보편적이지만, 정왕동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그들의 공간을 점적 패턴에서 면적 패턴으로 서서히 넓혀가고 있다. 따라서 정왕동 내에서도 분리된 도시 공간의 형성을 볼 수 있다. 다수 집단인 한국인과 소수 집단인 외국인 이주자들의 영역이 서로 혼재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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