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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치기소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200
이칭/별칭 배치기,서도소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형성 시기/일시 조선 후기 - 「뱃치기소리」 형성
채록 시기/일시 2008년 - 포동 새우개마을 경로당의 이종기, 유점옥에게 「뱃치기소리」 채록
채록 시기/일시 2016년 - 포동 선주 이만규로부터 「뱃치기소리」 채록
성격 노동요
토리 서도소리
가창자/시연자 박일엽

[정의]

경기도 시흥시 포동 새우개마을의 어부들이 연평도 고기잡이 때 부르던 노동요.

[개설]

「뱃치기소리」는 ‘배치기’라고 하는 경기도 시흥 지역의 향토 민요로 포동 새우개마을의 어부들이 연평도 고기잡이 때 부르던 노래다. 출항 전이나 고기를 건져 올릴 때, 그리고 마을 대동제 때에도 부른다. 본래 황해도 연평도와 인근 지역에서 부르기 시작한 서도소리지만, 연평도 조기잡이 때 파시(波市)[고기가 한창 잡힐 때에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를 접점으로 하여 서해안 전역에 퍼져 ‘배치기’가 불렸다. 토속 민요는 어느 한 지역에서 노동요의 형태로 시작하여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가사가 다양해지고, 음률도 바뀌게 마련이다.

배치기’는 연평도 고기잡이 어부들이 부르던 서도소리로 조기잡이를 흥나게 하는 노래였다. 어부들은 연평도에 도착하면 임경업(林慶業)[1594~1646] 사당에 제를 올리고, 식량과 물을 보충하여 어로에 나서는지라, 연평도에서 어로 생활을 하면서 ‘배치기’를 배운다. 그러므로 서해안 곳곳의 대동제에서도 ‘배치기’ 소리는 자주 등장한다. 시흥시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포동 새우개마을에서 마을 대동제를 지낼 때면 ‘배치기’를 부르고, 당집에 선주의 기를 올려 풍어(豐漁)를 비는 풍어제를 지냈다.

새우개 당집이 1860~1870년대부터 있었으며 1923년에는 대동제를 한 문서가 남아 있고, 당집의 상량문(上樑文)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19세기 이전부터 인천부 신현면 포동[지금의 시흥시 포동] 새우개마을의 어업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뱃치기소리」도 어업이 시작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채록/수집 상황]

「뱃치기소리」는 황해도 이주민과 새우개마을 어부의 입으로 전승되었다. 2008년 시흥시 포동 새우개마을 경로당의 이종기 노인회장과 유점옥 할머니의 고증으로 ‘배치기’ 노래를 확인하고, 2016년에는 시흥문화원 어르신문화콘텐츠사업팀이 선주였던 이만규[1931년생]에게서 노래를 채록하였다. 새우개마을 동편의 걸뚝에 황해도 이주민 집단촌이 있어 ‘배치기’는 질기게 전승될 수 있었다.

[구성 및 형식]

「뱃치기소리」는 서도소리로서 선율은 높은 음으로 질러댄 다음 중간음으로 내려와서 격렬하게 떨고, 다시 하강하여 종지(終止)한다. 현대에 들어서 국악인들이 부르는 통속 민요 ‘배치기’는 후렴구가 바뀌었으나, 새우개마을의 ‘배치기’는 예전의 후렴구를 그대로 부른다.

[내용]

[후렴] 에~ 헤이이 에~ 헤이이 에~ 헤이에~ 헤이에 에이 에헤이어하요

어영도 칠산을 다 쳐다 먹고 연평 바다로 돈실러 갑시다/ 돈실러 간다 돈실러 간다 연평바다로 돈실러 갑세다/ 이물 돛대는 사리화 피고 고물 돛대는 만장기 띄었다/ 연평장군님 귀히 보소 우리 배 불러서 도장원 주시오/ 오동추야 달밝은 밤에 새우젓 잡기가 재미가 난다/ 암매 숫매 맞마쳐 놓고 여드레 바다에 두둥실 났단다/ 연평바다 널린 조기 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 들여라/ 꽃피었네 꽃피었네 우리 배 이물에 함박꽃 피었네/ 간곳마다 치는 북은 우리 배가 다 치고 났단다/ 정월부터 치는 북은 오월 파송을 내둘러 쳤단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서해안 어부들은 모두 전라남도 영광군의 칠산 앞바다와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연평도 조기잡이에 열중하였다. 조기를 사고파는 한창 때의 연평 파시에는 수천 척의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서해안 어부들은 정월 대보름을 지나면서 마을의 안녕과 만선을 꿈꾸는 마을 대동굿을 할 때면 ‘배치기’를 불렀다. 선주들은 출어하면서 ‘배치기’를 불렀으며, 조기 그물을 뱃전으로 올리면서 ‘배치기’를 불렀다. 또한 만선 배로 귀향하면서 고향 바다 앞에서 마을을 향하여 만선을 알리며 ‘배치기’를 불렀다. ‘배치기’는 조기잡이에 열광하던 어부의 상징적 노래였는데, 시흥시 포동새우개마을에서도 그러했다.

[현황]

새우개마을에서 불려지던 ‘배치기’는 마을 주민과 시흥향토민요보존회에서 전승하여 부르고 있다. 새우개마을의 포구는 매립되고 ‘배치기’ 노래도 흔적없이 사라졌으나, 국악인 박일엽이 마을을 드나들며 채록하고 서해안 인근의 ‘배치기’ 노래를 확인하여 다시금 새우개마을에 ‘배치기’ 노래가 시작되었다. 시흥향토민요보존회는 시흥문화원에서 ‘배치기’를 가르치면서 무대 공연을 통하여 시흥 시민에게 시흥의 바닷가 민요 ‘배치기’를 전파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새우개마을에서 부르던 ‘배치기’는 서해안 바닷가에 면한 시흥의 역사 문화적 전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민요라 할 수 있다. 시흥시 포동 새우개마을의 어업은 1960년 포리호의 침몰을 끝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어 오늘날에는 포구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포동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어촌으로서는 가장 세금을 많이 내던 포구였다. 이제는 ‘배치기’ 노래와 당집만 남아 마을을 지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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