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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198
한자 民謠
영어공식명칭 Korean Folk Song
이칭/별칭 시흥향토민요,시흥민요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제18회 경기도 민속예술제 '시흥 상여소리' 출전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지역민들의 삶의 정서와 애환을 담아 민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시흥의 문화적 배경]

시흥 지역의 전통문화는 지금부터 5,000~6,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른다. 지리적으로는 리아스식[해안 부근의 대지나 구릉 또는 산지가 침강(沈降)에 의해 해면 밑으로 가라앉아 복잡한 해안선을 이루고 있는 지형] 서해안 바닷가의 풍부한 어족과 소금 생산의 기지였으며 간척 사업으로 농경지를 늘려가면서 농어촌을 형성하였다.

1721년(경종 1)에는 대규모 간척으로 농경지를 개간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담당했던 진휼청(賑恤廳)이 진자(賑資)[빈민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들어 군자만의 넓은 조간대(潮間帶)[만조 때의 해안선과 간조 때의 해안선 사이의 부분]와 소래 물길 양안의 조간대에 대규모 염전을 조성하였다. 군자염전소래염전을 축조하면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도 지역의 문화가 유입되었다.

평안도 기술자는 염전 건설에도 참여하였고, 중국인 노동자도 참여하였다.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관서(關西)[지금의 평안남도·평안북도·평양특별시·자강도 일대를 포함하는 지방]와 해서(海西)[황해도의 별칭] 지역 사람들이 다시금 유입되었고, 1980년대 시화국가산업단지[시화공단]가 조성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 등 외지인이 대거 유입되었다.

1989년 시 승격 당시 인구 약 10만 명에서 2018년 4월 말 기준으로 46만 5374명의 도시가 되었으며 외국인 노동자도 3만 2947명에 달하고 있어, 다양한 문화가 유입 혼융(混融)하여 새로운 문화 사조가 창조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이 시흥의 민요에도 반영되었다.

[현재 전하는 시흥의 민요]

통상적으로 민요는 토속 민요와 통속 민요로 구분한다. 토속 민요는 노동요나 의식요를 비롯한 지역에서 발생한 민요나 그 일대에서만 불려지는 민요를 말한다. 반면에 통속 민요는 소리꾼들이 전국 각지의 토속 민요를 즐겨 부르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민요를 말한다.

시흥시의 토속 민요로는 들노래 중 「실모소리」가 있다. 또한 경토리[민요·판소리·산조에 나타나는 독특한 경기 지방의 선율]로 부르는 「상여소리」「회닫이소리」가 있다. 「뱃치기소리」 역시 소리꾼들이 부르면서 편곡한 「뱃치기」가 아닌 서도 지역과 함께 하는 후렴구로 부른다. 호조벌을 비롯한 들녘에서 부르던 「들노래」도 있다.

시흥시의 통속 민요는 경기 지역의 민요와 관서 해서 지방의 서도소리가 폭넓게 불려 왔으며, 장터에서 부르던 통속 민요는 더욱 다양하다. 이들 민요와 함께 시조창(時調唱)[시조에다 곡을 붙여 부르는 노래]과 송서(誦書)[음률을 넣어서 글을 읽는 시창(詩唱)의 한 갈래]도 전한다. 시흥시의 민요는 오늘날 다문화가 어우러지는 시흥시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 「상여소리」「회닫이소리」

「상여소리」는 전통의 소리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다. 시흥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친 곳이므로 더욱 시원(始原)의 「상여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고종의 장례식 때 소리를 매겼다는 염씨의 「상여소리」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시흥의 「상여소리」는 경토리로 부르는 경기 지역의 「상여소리」와 큰 차이가 없다. 월곶동의 방연근은 소래염전 남단의 벌말에 살았는데, 「상여소리」「회닫이소리」 소리꾼으로 활동하였다. 염부로 일하던 외지인에게서 익힌 문학성이 풍부한 유장한 가사 한 벌을 「회닫이소리」로 전해 주었다. 그리고 방산동의 김인삼이 전수한 「상여소리」「회닫이소리」가 있다.

2011년 제18회 경기도 민속 예술제에 방산동 주민 70여 명이 함께 '시흥 상여소리'로 「상여소리」「회닫이소리」를 불러 민속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인삼이 전한 「상여소리」는 긴상여소리, 노호소리, 회다지소리, 사디오소리, 유회소리로 운구 및 장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금이동의 신현돌 역시 여러 대에 걸쳐 시흥시에서 살았으며, 평생 「상여소리」를 매겨 「월령가」 등의 소리를 남겼다.

2. 「뱃치기」와 바닷가 노래

시흥의 바닷가는 오래되고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흥시 정왕동오이도는 넓은 갯벌과 조개더미가 있으며 포동 새우개마을은 연평도 조기잡이를 나가던 포구가 있었다. 군자염전이 있던 갯벌 언덕에는 왕의 수라상의 수산물을 조달하던 사옹원(司饔院) 분원이 있었다. 그런 곳이므로 바닷가 노래가 발달하였다. 「뱃치기」새우개마을의 어부들이 연평도로 조기잡이를 나가면서 정월 대보름이나 7월의 대동제 때 부르고 출항하거나 뱃전에서 그물을 올리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뱃치기」는 서해안 많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통속 민요로도 발표하는 민요인데, 시흥시의 「뱃치기」는 토속 민요의 후렴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도소리보존회 시흥지부가 주최한 ‘만선의 꿈 시흥 바다’ 공연 때 「뱃치기」 연곡을 부르자 관람하던 새우개마을의 노인회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주민이 무대로 뛰어올라와 「뱃치기」를 함께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바닷가 노래로 갯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면서 부르던 노래인 「연평도 난봉가」는 서도소리를 하는 국악인들이 즐겨 부르는 통속 민요인데, 새우개마을에서도 불린다.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 보고서에 수록된 바디질하면서 부르던 온용각 선생의 「바디소리」도 전한다. 한편 뱃노래도 함께 불렸으며 「노젓는 소리」, 「술비타령」, 「봉죽타령」 등의 통속 민요와 잡가 「배따라기」도 함께 불리고 있다.

3. 「들노래」

시흥 지역의 대표적인 간척지 호조벌안현동, 거모동, 방산동의 들녘에서 부르던 「들노래」가 있다. 방산동에서 한생을 살아온 김연복과 김인삼, 안현동·호조벌에서 농사 짓던 이재홍, 목감동에서 태어나 월곶동에서 한생을 살아온 방연근, 그리고 포동 이태현의 입을 통하여 「들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민속학자 이소라의 『경기도 논맴소리』에 「모심기소리」, 「실모소리와 양산도」, 「둘레류」가 전한다. 「실모소리」는 시흥시에서 발생한 논맴소리여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시흥의 「들노래」는 국악인 박일엽이 전승하여 가르치고 있다.

[장터에서 불리던 민요]

장터에서 부르던 노래는 노동요나 의식요가 아닌 여흥을 즐길 때 부르던 유희요다. 장터의 특성상 이곳저곳을 떠도는 상인들과 지역의 소리꾼들이 한데 어우러져 전승한다. 노랫가락과 「장타령」, 「방아타령」 등의 노래가 있다. 장터에 불리던 민요로는 군자동의 이익수가 부른 노랫가락이 있고, 거모동의 김창문이 부른 「장타령」과 군자동의 표수만이 부른 「방아타령」이 있다. 두 곡 모두 거모동도일시장에서 부르던 민요들이다.

[소리꾼들이 즐겨 부르던 민요]

소리꾼들은 민요를 즐기면서 잡가도 함께 불렀다. 판소리를 채록한 기록은 없으며, 바닷가를 통하여 황해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에 의하여 서도 지역의 「초한가」와 「난봉가」, 「범벅타령」, 「언문뒷풀이」와 「비나리」를 불렀다. 월곶동의 방연근은 술 한잔 거나해지면 「초한가」와 「난봉가」를 즐겨 불렀으며, 밭일을 할 때엔 「범벅타령」을 즐겨 불렀다고 한다. 방산동의 김인삼은 향토사학자 이한기[필명 이승언]가 채록한 「비나리」를 불렀으며, 박일엽이 채록할 당시엔 「제전」과 「창부타령」을 즐겨 불렀다.

[시조창과 송서]

시흥은 조선 중·후기 경화사족(京華士族)[번화한 한양과 근교에 거주한 사족]의 근거지다. 장유(張維)[1587~1638]가 12년간 시흥에 거주하였으며, 정제두(鄭齊斗)[1649~1736]는 20년간 시흥에 거주하면서 한국 양명학의 체계를 세웠다. 능곡동에는 광해군의 장인 류자신(柳自新)[1541~1612]의 유택이 있으며 류자신 가문의 전설이 전하는데, 류자신의 시조 「추산이」는 전국의 명인들이 즐겨 부르는 시조창이다. 한편 관곡지를 보수한 안산군수 권용정(權用正)[1801~1861]이 시조창을 한시로 번역한 시 「정인(情人)」[남창지름시조(男唱-時調) ‘바람도 쉬어 넘고’를 한시로 번역]이 남아 있다. 이 두 개의 시조는 현재 전국의 시조창 동호인들이 즐겨 부르는 곡이다. 하중동에 정자를 짓고 시회(詩會)를 즐긴 사로사(四老社)[4명의 선비가 즐기던 시회]가 남긴 시집 『오헌집(傲軒集)』이 함께 전하고 있어 선비 문화가 번성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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