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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777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이칭/별칭 공교(孔敎),공자교(孔子敎)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미엽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서 공자를 시조로 하는 전통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 또는 종교.

[개설]

유교란 유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부르는 말로, 공자(孔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이며 공교(孔敎) 또는 공자교(孔子敎)라고도 부른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諸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경기도 시흥 지역은 조선시대 하륜(河崙)[1347~1416], 강희맹(姜希孟)[1424~1483], 장유(張維)[1587~1638] 등의 유학자들과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유교 관련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유교의 이념]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사는 군서(群棲)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 사이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유교에서는 ‘인(仁)'의 글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너와 나의 관계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교는 바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 철학이고 종교이다. 흔히 유학의 근본 사상을 인이라고 한다. 논어(論語)에 나타난 공부자(孔夫子)[공자]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은 곧 사랑이다.”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즉,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자(朱子)도 인은 ‘사랑의 원리[愛之理]'라 주석하고 있다. 유교는 사랑의 철학인 것이다.

유교의 근본 사상은 역(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은 세 가지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변역(變易), 불역(不易), 이간(易簡)이 그것이다. 첫째, 변역이란 변하고 바뀐다는 뜻이다. 이 세상, 아니 우주와 그 속을 채우고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이다. 둘째, 변하는 중에도 변하지 않는 줄기가 있고 바뀌는 중에도 바뀌지 않는 대목이 있다. 이것을 불역(不易)이라고 한다. 해와 달이 운행하고 춘하추동이 차례로 갈마들듯이 인간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큰 줄기[大經大法]는 변하지 않는다. 셋째, 역은 변역과 불역을 뜻하지만 그 원리가 어렵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다. 역을 이간(易簡)이라 풀이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역의 원리는 쉽고 간단하다는 것이다. 유교는 변화의 철학인 것이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시흥 지역에 유교가 제도적으로 수용된 시기였다. 유교는 대략 기원전 2~3세기경에 한반도에 수용되는데, 시흥 지역은 처음 고구려에 속하였다가 6세기경 백제에 소속되었다. 따라서 시흥 지역은 고구려에 소속되었을 때 유교를 처음 접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백제가 통일 전쟁에 임하던 시기 백제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전제 왕권이 확립되고 유학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설치되었으며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와 도당(渡唐) 유학생들이 배출되었다. 당시 시흥 지역은 한주(漢州)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수도인 경주(慶州)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앙정부의 유교 정책의 영향력이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새로운 정치적 지도 이념으로 관심을 받았고, 불교와 함께 고려를 지탱하는 사상이 되었다. 특히 제4대 왕 광종 대에 과거제를 실시하고, 제6대 왕 성종 대에 고려시대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중수(重修)와 12목(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파견하였다. 이후 제17대 왕 인종 대에 향학(鄕學)을 설치한 것은 유학에 대한 교육 기반을 만든 것이었다. 당시 시흥 지역은 금주현(衿州縣), 안산현(安山縣), 과주현(果州縣)에 해당되는데 금주현(衿州縣)와 안산현(安山縣)은 양주목(楊州牧), 과주현(果州縣)는 광주목(廣州牧)에 각각 속하였던 만큼 시흥 지역에도 경학박사가 파견되어 유학이 교육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고려 후기 송나라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성리학(性理學)이 신진 사대부에 의해 도입되었다. 조선은 이(理)와 기(氣)를 바탕으로 하여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심성(心性)을 다루는 철학적·사변적 사상 체계인 성리학을 정치 이념이자 사회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규정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도입함과 동시에 성균관과 향교 및 서원 등에서도 유교 경전만을 교육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지배 이념인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고자 1읍 1교의 원칙하에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치하였다. 1398년(태조 7) 전국 160개의 주·군에 1개씩의 향교를 설치하였는데, 시흥 지역에 설치한 것이 시흥향교(始興鄕校)로, 과천읍[지금의 과천시] 관악산 기슭에 있어 과천향교(果川鄕校)라고도 불렀다.

시흥 지역은 유학[성리학]을 공부한 유명 인사들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조선 전기 관인(官人)으로 활동한 하연(河演)[1376~1453]의 무덤이 소래산에 있고, 그의 아들 하우명(河友明)[1413~1495]과 그의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며 강희맹을 비롯한 진주 강씨(晉州康氏)의 세거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로도 이어져 시흥 지역은 성리학을 공부한 사족(士族)들의 세거지가 되어 많은 인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하였는데, 창녕 성씨(昌寧成氏)의 성희안(成希顔)[1461~1513], 진주 강씨강극성(姜克誠)[1526~1576]과 강사상(姜士尙)[1519~1581],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류잠(柳潛)[1509~1576], 덕수 장씨(德水張氏)장운익(張雲翼)[1561~1599] 및 장유와 장신(張紳)[?~1637]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문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이곳에서 세거하다가 관직으로 현달(顯達)[벼슬·명성·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하면 생활 기반을 도성(都城)으로 옮기는 경향이 심화되어 시흥 지역은 관료 가문의 묘산(墓山) 소재지로서 잠시 우거(寓居)하는 곳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시흥 지역에만 국한되는 상황이 아닌 경기 지역에 공통되는 현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근대]

개항과 더불어 서구 문물이 유입되고 제국주의 세력이 침입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중심으로 한 유림(儒林) 세력들은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주장하는 한편, 일반 대중을 교화하고 선도하면서 항일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는 유림의 저항 의식을 제거하기 위해 탄압과 회유책 및 친일화 정책을 병행하였다. 1940년 일제가 ‘황민화(皇民化)’를 목표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한 상황에서 이를 거부하는 불복종 저항이 있었고, 시흥을 포함한 경기 지역의 유림들도 이 저항에 참여하였다.

[현대]

2018년 7월 현재 시흥시 내에서 유교를 종교로 신봉하는 신자의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교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은 총 12점으로 종류별로는 사당(祠堂) 4점, 재실(齋室) 5점, 정려문(旌閭門)·정각(旌閭)·정려비(旌閭碑)가 각 1점씩이다. 사당으로는 문익사(文翼祠), 영평사(鈴平祠), 충경사(忠景祠), 안장사(安葬祠)가 있다. 재실로는 경효재(敬孝齋), 연성재(蓮城齋), 영모재(永慕齋), 인현재(仁峴齋), 소산서원(蘇山書院)이 있다. 또한 이상기(李相夔) 정려문, 하우명 효자정각(孝子旌閣), 하우명 정려비가 남아 있다. 이들은 대부분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경기 지역의 다른 시·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물·유적이 많지 않은 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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