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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33
한자 尹民逸墓
영어공식명칭 Tomb of Yoon Minil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산77-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윤민일 묘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64년 2월 20일연표보기 - 윤민일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35년 4월 25일연표보기 - 윤민일 사망
이장 시기/일시 1649년 12월연표보기 - 윤민일 묘 이장
이장 시기/일시 1980년 6월연표보기 - 윤민일 묘 이장
개축 시기/일시 2005년 4월 8일연표보기 - 선영 전체 봉분 정비 및 호석 건립
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산77-3 지도보기
원소재지 경기도 안산 무등곡 구리
성격 묘소
관련 인물 성혼|윤섭|윤엄|김주|신잡|윤민헌|윤강|윤두|윤선거|오윤겸|윤추|정인홍

[정의]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윤민일의 묘.

[개설]

윤민일(尹民逸)[1564~1635]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현세(顯世), 호는 지산(芝山)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이고,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셋째 형 윤민헌(尹民獻)과 같이 경기도 파주의 우계서실(牛溪書室)에서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1588년(선조 21) 생원과 진사 양시(兩試)에 입격(入格)하고,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조정랑과 예조좌랑을 역임하고 1602년(선조 35)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하였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성혼의 관작(官爵)을 추탈하려 하자 지평으로서 아뢰기를, “신은 곧 성혼의 문생입니다. 신의 직을 파척(罷斥)하도록 명하소서.”라고 상소하여 체차(遞差)[경질]되었다가 수원판관으로 나갔다. 이후 합천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정인홍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1609년(광해군 1)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동래부(東萊府) 수세관(收稅官)으로 있을 때, 일본에 파견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正使) 오윤겸(吳允謙)을 맞이해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다.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9월 4일 영해부사로서 안동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을 접대하였다. 풍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강화도로 가서 인조에게 문안을 드렸고, 가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었으나 금방 사직하고 안산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위치]

윤민일 묘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산77-3에 있다. 그의 가계 선영(先塋) 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시흥시청에서 월곶동으로 가는 동서로 242 옆 공동묘지 입구에 ‘파평윤씨 안산문중참판공휘민일지묘(坡平尹氏 安山門中參判公諱民逸之墓)’ 표석이 서있다. 그리로 오르면 북측 산자락에 위치한다.

[변천]

처음에 경기도 안산 무등곡 구리(舊里) 앞 산기슭에 장사를 지냈었는데, 상서(尙書)를 지낸 조카 윤강(尹絳)이 동쪽 당정리 언덕에 무덤을 쓰자 1649년(효종 즉위년) 12월에 이장하였다. 황씨(黃氏)와 임씨(任氏) 두 부인은 합장되었고, 신씨(申氏) 부인은 금천(衿川) 사자암(獅子巖)[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는 아버지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 곁에 따로 장사를 지냈다. 1980년 6월 반월국가산업단지 공사로 지금의 응암곡으로 이장하였다. 1989년 2월 16일 비를 추가로 세웠고, 2005년 4월 8일 선영 전체의 봉분을 정비하면서 호석(護石)을 하였다. 2018년 현재 신씨 부인도 합장되어 있다.

[형태]

윤민일 묘에는 혼유석(魂遊石), 상석, 향로석 등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봉분 왼쪽으로 방부원수(方趺圓首)의 높이 1.45m의 묘표(墓表)가 건립되어 있다. 백(白)대리석의 높이 1.3m의 비신(碑身) 앞면에는 피장자(被葬者)의 신분을 쓰고 뒷면에 음기(陰記)하였는데,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봉분 오른쪽으로 새롭게 비석을 세우고 호석과 망주석 한 쌍도 건립하였다.

[금석문]

비 앞면에 '정부인풍천임씨 증정부인창원 황씨 부좌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통정대부 돈녕부도정 윤공휘민일지묘(貞夫人豊川任氏贈貞夫人昌原黃氏祔左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政大夫敦寧府都正尹公諱民逸之墓)'라고 쓰고, 묘제를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부총관 행통정대부 돈녕부도정 윤공묘표(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藝文官提學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政大夫敦寧府都正尹公墓表)'라고 써 비석의 종류가 묘표임을 알 수 있다. 아들 윤두(尹紏)가 묘비(墓碑)를 세웠고, 성혼의 외손자이자 둘째 딸의 사위인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가 묘표를 지었다. 글씨는 윤선거의 둘째아들 윤추(尹推)가 썼다.

[의의와 평가]

윤민일 묘를 통해 조선시대 분묘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으며 특히 묘표는 윤선거가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묘표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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