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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13
한자 大月面
영어공식명칭 Daewolmy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조선,근대
집필자 이우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조선 후기 - 안산군 대월면 설치
개정 시기/일시 1914년 - 안산군 대월면 시흥군 군자면으로 편입
개정 시기/일시 1989년 - 시흥군 군자면이 수암면, 소래면과 합쳐져 시흥시로 승격

[정의]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던 조선시대 행정구역.

[개설]

대월면은 조선 후기 안산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시흥군 군자면으로 통합되면서 일부 지역이 경기도 시흥시에 속하게 되었다.

[관련 기록]

조선 후기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군내면, 잉화면, 와리면, 마유면, 초산면과 함께 대월면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 영조 때 정상기(鄭尙驥)[1678~1752]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정후조(鄭厚祚)[1758~1793]가 수정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경기도 지도첩(地圖帖)인 『동국팔로분지도(東國八路分地圖)』, 김정호(金正浩)[1804~1866 추정]가 1834년(순조 34) 제작한 전국 지도인 『청구도(靑邱圖)』, 19세기 초에 제작된 회화식 전국 군현 지도인 『광여도(廣輿圖)』, 19세기 말에 제작된 『경기도지도(京畿道地圖)』 등에도 군내면, 마유면, 잉화면, 와리면, 초산면 등과 함께 대월면의 명칭이 확인되고 있다.

[내용]

대월면의 면별 호구 수와 관련하여 『여지도서』를 확인해 보면, 당시 대월면의 면적은 10.7㎢이며, 239호(戶)에 남성 531명, 여성 521명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상으로 당시 안산군에 속했던 6개 면 중에서 면적이 가장 작고, 전체 인구수와 호당 인구수에서도 가장 적은 지역이었다. 18세기 말 제작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대월면에 266호가 있었고, 남성 616명, 여성 528명 등 총 1,144명이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9년의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를 확인해 보면 대월면의 총 262호 중에서 농업 250호, 상업 8호, 관공리 1호, 기타 3호로 기록되어 있어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의 비중이 전체의 95%를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반 편찬된 『경기지』에는 대월면에 있었던 장시(場市)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안산군의 9개 면 중 하나인 초산면방축장시(防築場市), 대월면에 산대장시(山垈場市)가 있었다고 한다. 두 개의 장시 모두 후미지고 으슥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특별한 통화(通貨)가 없이 토산물을 교역할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 지방장시』,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에도 대월면에 산대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위치는 군자산 남쪽으로 간척 사업이 실시되기 이전에 산대장시에서 서해까지는 약 2㎞로 수산물과 내륙 농산물의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변천]

1760년(영조 36) 『여지도서』의 기록부터 1909년 『민적통계표』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대월면은 대부분의 자료에서 안산군의 6개 면 중에서 한 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군면 통폐합 조치로 안산군은 사라지고 관할구역은 인근의 시흥군과 수원군 등으로 분할·흡수되었다. 또한 종전 9개 면에서 군자면, 수암면, 반월면 등 3개 면으로 통합되었다. 통합 이전의 대월면에는 거모포, 석곡동, 선부동, 달산리 등 네 개의 동리가 속해 있었으나, 통합과 동시에 거모포와 석곡동이 거모리로, 선부동과 달산리가 선부리로 개편되었고, 거모리와 선부리는 시흥군 군자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군자면의 일부 지역인 거모리가 지금의 시흥시 거모동에 속하게 되었고, 따라서 과거 대월면의 일부 지역 역시 지금의 시흥시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대월면은 조선시대 이후의 안산군시흥군, 지금의 안산시와 시흥시의 행정 제도 개편을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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