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214
한자 鷄卵-
영어공식명칭 Gyeran-maeul
이칭/별칭 시흥시,자연 마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정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개설]

계란마을소래산 남쪽 하연(河演) 선생 묘 아래 진양 하씨(晋陽河氏)[진주 하씨(晉州河氏)]들이 세거지를 이루면서 조성된 마을이다. 6.25전쟁 후에는 피란민들이 들어와 정착하였으나, 지금은 원주민들과 정착민들의 일부만 남아 있다.

[명칭 유래]

소래산 남쪽 자락에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하연 선생 묘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453년(단종 원년) 하연이 죽자 단종은 부친 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하연의 묘를 좋은 곳에 쓰기 위하여 지관(地官)을 보냈다. 소래산 주변에서 명당을 찾던 지관은 명당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하여 계란을 가져다 놓았고, 다음날 새벽에 병아리 울음소리가 들려 이곳이 명당임을 확인하게 되어 하연의 묘를 썼다고 한다. 그 후에 하연의 후손인 진양 하씨들이 묘역 아래에 터를 잡고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 마을을 계란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계란마을은 조선시대부터 하연의 묘역이 조성되자 그의 셋째아들 하우명(河友明)소래산 아래에 거주하면서 진양 하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진양 하씨들은 한창때는 80여 가구가 있었으나 6.25전쟁 이후에 토박이들은 외부로 나가고 피란민들이 들어와 계란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에 마을의 가구 수는 50~60 가구에 이르렀으며, 당시 피란민들은 진양 하씨 문중의 땅을 빌려서 거주하였다.

1979년 계란마을의 서쪽 지역이던 명진마을에 새마을 사업으로 취락 구조 개선 사업 주거 단지가 조성되자 절반[25가구] 가까이 이주하였다. 원래 계란마을에 속했던 명진마을은 ‘밝게 전진하자’라는 의미의 명진마을로 이름을 지었고, 자연스럽게 계란마을에서 분리되었다. 1990년 후반부터는 그린벨트 안에서의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지 못한 입주민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고 원주민들과 정착민들의 일부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자연환경]

계란마을은 북쪽으로 소래산이 있으며, 소래산에서 발원한 신천이 마을 앞을 돌아 흐른다.

[현황]

계란마을국도42호선 수인로 변에 자리하였는데, 화원(花園)들이 입구 도로변을 차지하고 있다. 밀집된 비닐하우스에는 화원과 관상어 양어장이 있다. 지역 학생들에게 인문, 교양, 예절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소산서원과 시흥시 향토유적 제3호 하연 선생 묘, 시흥시 향토유적 제11호 하우명 효자정각이 있다. 소래산 자락은 유적지를 찾는 탐방객들과 등산을 위해 찾는 주 진입로 역할을 하고 있다. 여전히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그린벨트 지역의 계란마을 일대는 효문화공원과 함께 숲 교육장인 유아숲이 조성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