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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051
한자 戶曹-
영어공식명칭 Hojobangjuk
이칭/별칭 걸뚝,진청언(賑廳堰),석장언(石場堰),호조방축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지리/인문 지리
유형 유적/유적(일반),지명/시설
지역 경기도 시흥시 포동|하중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심우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721년연표보기 - 호조방죽 완공
성격
크기(높이,길이,둘레) 약 720m[길이]

[정의]

경기도 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를 연결하여 쌓았던 방죽.

[개설]

호조방죽(戶曹-)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를 이어 축조되었던 길이 약 720m의 인공 둑이다. 바다로서 개펄이었던 이곳에 조선 경종 원년인 1721년에 둑을 완공하여 농경지로 개간한 것이다. 이 둑은 과거 인천부안산군을 연결하는 교통로 구실을 하였으며, 국도39호선 구도로가 건설되면서 현재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시흥 시민들이 제방을 부르는 명칭은 호조방죽걸뚝 두 가지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호조방죽 이외에도 진청언(賑廳堰), 석장언(石場堰)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건립 경위]

시흥시 북쪽의 소래산, 서남쪽의 군자봉 사이로 은행천보통천이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두 하천이 매화동, 은행동, 미산동, 도창동, 하상동, 하중동 일대에 약 150만 평[4.96㎢]의 커다란 들판을 형성해 놓았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호조방죽을 축조하여 농경지로 현재까지 활용하고 있다. 이 들판이 호조벌이다.

18세기를 전후하여 백성 구제 기관인 진휼청(賑恤廳)이 갈수록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지면서 재정이 악화되었다. 세수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 일환으로 호조방죽을 쌓은 것이다. 그 근거는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1725년) 8월 9일」에 기록된 “지금 이 방죽을 쌓은 것은 오로지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세곡을 거두어서 진자에 보태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今此築堰 專出於爲民蒙利而收其稅穀 以爲添補賑資之計矣].”라는 내용이다.

축조 시기는 조선 숙종 46년인 1720년에 감독하는 관리를 지정하고 군인을 고용하여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인 1721년(경종 원년)에 완공하였다. 『승정원일기』 「경종 원년(1721년) 12월 6일」에 “안산과 인천 두 읍의 경계에 제방을 축조하여 논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 있는 까닭에 별도로 감독관을 정하고 군대를 고용해서 비로소 역사를 시작하였고 지금 이미 완성했습니다[安山仁川兩邑之境 有可以築堰作畓之處 故別定監官 雇軍始役 今已完畢].”라는 기록은 축조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일부가 된다.

호조방죽을 축조한 총책임자는 진휼 당상(賑恤堂上) 민진원(閔鎭遠), 실무 책임자는 유덕기(兪德基), 이세영(李世榮), 장진도(張震燾) 등 세 사람이었다. 『승정원일기』 「경종 3년(1723년) 5월 25일」에 “윤회가 또 아뢰는바, 저번에 민진원이 진휼 당상을 할 때, 인천과 안산의 두 읍 사이에 방조제를 신축했습니다.……청컨대 책임자 유덕기, 이세영, 장진도 등을 감금하여 엄하게 형벌을 내리십시오[會又所啓 向者閔鎭遠爲賑恤堂上時 新築海堰於仁川·安山兩邑之間……請首倡任事者兪德基李世榮張震燾等 囚禁嚴刑].”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형태]

호조방죽은 '일(一)' 자 모양의 제방이다. 제방의 좌측 끝[하중동 돌장재]에는 보통천으로부터 내려온 물을 관리하는 1기의 흥부배수갑문, 우측 끝[포동 걸뚝]에는 은행천으로부터 내려온 물을 관리하는 1기의 포동배수갑문이 있다. 두 갑문(閘門)은 하천의 배수(排水)와 해수의 역류를 막아주는 방조(防潮) 기능을 겸하고 있다.

지금은 수문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문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이 제방의 정중앙 부분에 남아 있다. 지역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경지 정리가 되기 전에 제방의 정중앙 부분으로도 ‘한개’라고 부르던 물길이 있어 수문을 이용해서 호조벌의 물을 내보내기도 하고 바닷물을 막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지 정리를 하면서 ‘한개’를 없애고 방죽 좌·우측에 설치된 배수갑문만으로도 호조벌의 배수와 방조의 기능을 다할 수 있어 없앴다고 한다.

[현황]

호조방죽으로 막힌 호조벌은 시흥시 최대의 곡창 지대로 지역의 특산미인 ‘햇토미’가 여기서 생산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호조방죽 축조로 인해 새로이 생겨난 농경지는 시흥 지역민의 삶의 터전으로써 수백 년간 생계유지의 젖줄 역할을 해왔다. 이렇듯 생활사 측면에서 보면, 호조벌과 시흥 지역민과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외에도 역사적으로도 보자면, 약 300년 전에 국가 기관이 국가 정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방죽을 축조하여 이곳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통해 백성을 구휼하는 공적인 기능을 수행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시흥 시민에게 산소 탱크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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